일반 독자를 넘어서 '독서가'로서 책을 읽는 법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독서가는 자신만의 세계관과 취향이 확고한 사람을 의미한다.
저자가 일본어인지라 초반에 일본어 고어에 대한 설명은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만 한글에도 어원이 상당수가 한자인데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특히 학문 영역의) 일본어식 외래어가 많기에 공감할 수 있는 측면도 많다. 개인적으로 외국 저자의 번역문을 많이 읽는 편이라 특히 외래어의 번역에 있어 저자의 통찰은 매우 공감이 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희곡과 소설의 차이점 등 장르별 문장의 특징을 예시를 들어 잘 설명한 점이다. 소설가로 정점을 달린 저자가 일타강사로 나선 셈이다.
글을 씀에 있어 문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기품과 격조 있는 문장을 강조하는 것은 꽤나 의고주의(擬古主義) 적이다. 저자의 배경(명문가, 도쿄대 법대)과 취향이 꽤나 엘리트주의적이라 독자 중에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한없이 가벼운 글만 쓰는 세상에 10년 뒤에 평가를 기다리는 반(反) 시대적 문장을 고민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여러모로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은 실용성 측면보다는 예술론의 측면에서 볼 때 한 수 위이다. 저자는 글을 우아하게 쓰는 법을 익히기 전에 그러한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독서가는 작가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티보데는 소설 독자를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일반 독자lecteur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가liseur이다. 티보데에 따르면 “소설의 일반 독자란 소설이라면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 며 '취향'이라는 말 속에 내포된 내적, 외적인 어떠한 요소에도 이끌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신문소설을 읽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일반 독자이다. 반면에 독서가는 '그 사람을 위해 소설 세계가 존재하는 사람'이며, 또한 '문학이 가상의 오락이 아닌 본질적인 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어의 특질을 항상 눈앞에서 보게 된다. 많은 작가가 이러한 특질로부터 도망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인이 일본어를 사용하는 이상, 오랜 전통과 일본어 특유의 특질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일본 문학은 좋든 싫든 여성적 관념, 즉 감정과 정념의 관념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근대문학에서 성공한 작품들은 자연히 일본 고전문학의 가장 풍부한 특질을 이어받은 것들이었다. 가령 고전적 교양이 없는 작가라도 언어 그 자체에 의해 저절로 제약을 받고, 과거의 양분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리라.
풍속은 우스워 보이면 끝난 것이며, 아름다움은 특이한 데서 시작해서 우스워지면 끝이다. 즉 신선한 미학의 발전기에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하고 불쾌한 인상을 받지만, 그것이 점점 일반화됨에 따라 평균적 미의 표준으로 보이고, 낡아짐에 따라 구태의연하고 우스워 보이게 된다.
서양에서 철학 용어는 특정 철학자가 만든 신조어를 제외하면, 모두 일상용어에서 발생하여 일상용어의 학문적 엄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일 정 정의에 따라 그 용도를 한정해서 철학상의 학술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처음에 철학상의 학술 용어로 수입된 말의 개념이 서서히 애매해지고 확장되어 일상용어로 녹아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문장을 맛본다기보다는 소설을 맛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작가의 문장이 좋다는 말은 거의 들리 지 않고, 작가의 소설이 재미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가 뭐 래도 문장은 소설의 유일한 실체이며, 말은 소설의 유일한 재료이다. 여러분은 그림을 볼 때 색채를 보지 않는가. 그런데 말은 소설의 색채이다. 여러분은 음악을 들을 때 소리를 듣지 않는가. 그런데 말은 소설의 악보이다.
결국 글을 맛본다는 건 오랜 언어의 전통을 맛 보는 일이다. 그리고 문장의 모든 현대와 미래의 모습 속에 서도, 문장의 오랜 뿌리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문장을 맛보는 일은 우리의 역사를 인식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어느 미국 작가한테 이와 관련된 어느 평론가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평론가의 이름 은 잊었지만, 소설 속 대화에 관한 이런 주장이었다.
"소설에서 대화란 큰 파도가 부서질 때 일어나는 하얀 물 보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지문은 파도인데 앞바다에서 천천히 굽이쳐 들어와 물에서 부서지는 것처럼 더는 버틸 수 없어질 때까지 높이 쳐들었다가 확 무너질 때처럼 대화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희곡에서는 대화가 나오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으므로 독자는 일일이 상상으로 보충하며 읽어야 한다. 현재도 희곡 단행본은 가장 안 팔리는 종류의 책 중 하나이 다.
요컨대 희곡 문장이란 때로는 지나친 도치법을 남용하거 나 대화를 극도로 비틀어 일본어 대화의 표현력을 가장 높 게 발휘하며, 어쨌든 산문과 달리 확실한 형식을 벗어나 융통성이 있고 유동적이고 춤추는 독특한 문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소설 문장이 걷는 문장이라고 한다면 희곡 문장은 춤추는 문장인 것이다.
그런데 외국 출판사는 소설책의 주석을 싫어한다. 주석 없이 어떻게든 이해시키는 게 소설 독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번역에는 대조적이며 전형적인 두 가지 태 도가 있다. 하나는 대개 개성이 강한 문학가의 번역에서 나타나 는데, 어차피 외국 문물, 풍속이 완전히 그대로 일본어로 옮 겨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강한 개성으로 외국 문학을 소화시킨 후 개성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나아가 원작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각 깊은 곳에서 비롯된 애정을 그대로 번역하여 마치 자신의 작품인 양 타성적인 번역문을 만 드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정통적인 번역 방식이라고 인식되는 것인데, 도저히 불가능하겠지만 원문이 가진 분위기, 원문이 가진 독창성을 십 분의 일이라도 가능한 한 일본어로 재현하려는 양심적인 어학자적 태도와 풍부하고 깊은 문학 감상 력을 가진 어학자적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 시도하는 번역이다.
근대문학에서 심리소설의 가장 좋은 모범은 스탕달인데, 일본에는 이토 세이伊藤整 등이 소개한 제임스 조이스 의 『율리시스』의 흐름을 계승한 앵글로색슨 심리소설과 프랑스의 고전적 전통에 따른 프랑스 심리소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발명했다고 일컬어지는 비자발적 기억 mémoire involontaire을 토대로 한 심리주의 문학 이렇게 세 가지가 뒤섞여 소개되었다.
네 번째로는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심리해부소설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심리묘사가 잘되어 있는 소설은 잘 쓴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리묘사는 심리묘사의 허무함과 두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완벽히 구사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심리묘사란 하나의 역설이며, 영원히 알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이론적 승리이다.
의성어의 가장 큰 특징은 추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사람의 귀에 전달하는 작용밖에 없어 언어 가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는 추락한 형태이다.
그리고... 지금 쓴 '그리고'도 그 하나인데, '자, 이제'라거 나 '그런데'라거나 '사실은'이라거나 '뭐니 뭐니 해도'라거나 '그렇다고는 해도'라거나, 그런 말을 절의 처음에 사용한 문 장은 매우 설화체적 친근감을 주지만 문장의 격조를 잃게 한다.
나는 소설가이다. 책상에 앉아 있다.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를 합성해 어떤 약품을 만드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엇인가 원소를 추출해서 그것을 문장으로 고정한다.
물론 문장의 목적에 따라 우리의 언어 감각이 다양하게 변한다. 예를 들면 소설에서 나는 영화배우의 이름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매릴린 먼로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문장이 내년에 사라진다 해도, 적어도 십 년 뒤를 생각해야 문장을 쓰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장의 격조와 기품은 어디까지나 고전적 교양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고전시대의 미美의 단순함과 간결함은 시대가 달라져도 마음을 감동시키므로 현대의 복잡성을 표현한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장조차, 조잡한 현대의 현상에 굴복하지 않는 한 어딘가에서 이 고전적 특질을 통해 현대의 현상을 극복하고 있을 것이다. 문체를 통한 현상의 극복이 문장의 최종적 이상인 한, 결국 문체의 최종적 이상은 기품과 격조일 것이다.
그래서 글이 작가와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아주 낮은 단계에서는 글이 곧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인 중에는 매우 저속한 정신세계를 가졌으면서도 품격이 있어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란 것이 누구의 눈에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이 '글로 쓴 예술'을 뛰어넘기 란 이주 쉬운 일이다. 인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사 실이 항상 상상력을 넘어선다. 예를 들면 동서고금의 학살이나 살육을 기록한 작품이 아무리 많아도, 원자폭탄의 참상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실의 영역은 이렇게 수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소설가는 숫자 하나하나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언제 나 주제와 관련지어서 소설적 구조를 단순 명쾌하게 해야 하므로, 저절로 숫자의 제약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영국인은 전쟁터의 격렬한 전투 속에서도 유머 정신을 발휘한다. 유머와 냉철함, 남성적 용기는 언제나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같이 다닌다. 유머란 지성이 가장 부드러운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독일인은 매우 남성적이고 무예를 숭상하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지 만,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남성적 특질 중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