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효율성의 역습

by polisopher

지긋지긋했던 폭염도 지나고 모처럼 지방청에 있는 친구와 지리산에 오르기로 했다. 전날 당직이므로 이래저래 잔무를 처리하고 나면 9시쯤에는 만날 수 있지 않겠냐며 오산 쪽에서 만나 한 차로 이동하자고 했다.


"아직도 청?"

"퇴근하려는데 이번 행사에 가족들을 초대하면 어떻겠냐고 청장이 한마디 했다나 봐."

"그래서.. 몇 시에 끝나는데."

"초안만 잡아주고 가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뭐. 예정보다 20분 정도 늦을 듯."

"알았다. 야야 대충햐. 너 없으면 사무실 안 돌아간다니."

"끊어라. 빨리 하게."


친구 놈은 예정보다 20분 정도 늦는다고 했지만 40분을 넘어서야 연락이 왔다.


"야야야 철아. 빠꾸 맞았어. 과장은 오케이 했는데 부장이 너무 맹숭맹숭하지 않겠냐는 거야."

"뭐야. 그럼 너무 늦는데.. 짜샤. 그냥 맡아달라고 하고 얼른 나와."

"계장이 자기는 소질 없다고 나더러 마무리 좀 해달라는데 별 수 없잖아."

"야. 그럼 천천히 가고 있을 테니까. 뒤 따라와라. 논산이나 전주에서 만나게."

"오케."


콩나물 국밥은 맛있었다. 콩나물국 하나를 먹더라도 전라도, 특히 전주에서 먹야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감탄할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맛을 음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과장이야. 아까는 좋다고 하더니.. 부장이 한 소리하니까. 거슬렸던 모양이야.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긴데.. 가족들 위치가 너무 사이드로 밀린 거 아니냐는 거야. 그럼 청장이 권위적으로 비출 수 있대나 어쨌대나."

"지랄 쌈 싸 먹고 자빠졌네."

"아직 시간은 있어. 서둘러서 하다 보면 3시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

"중산리 코스는 틀렸네."

"미안하다. 일단 6시까지 내려온다는 생각으로 타. 법계사만 보고 오든가."

"천왕봉을 밟지 않으면 내려가는 의미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모처럼 좋은 공기 좀 마시고.. 너 사색하는 거 좋아하잖아. 민폐꾼들도 없을 테니 조용하고 좋겠네."

"우씨 썩을 놈.."

"내가 삼겹살 사마. 산 타고 내려와서 먹는 삼겹살과 막걸리.. 어때? 나쁘지 않잖아."

"또라이들한테 너무 휘둘리지 말고 적당히 던져 놓고 나와라."

"오케"

"그놈의 오케이 소리는.."


모처럼의 산행은 어그러진 기분을 순식간에 펴주었다. 서둘러 오르다 보니 어느새 법계사에 이르렀다. 정상에 다다른 듯 마음은 풀어졌다. 팔다리도 마찬가지. 법계사 돌계단에 앉아 땀을 식혔다. 땀에 한기가 찰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글감이 사라질세라 휴대폰 아래에 박힌 펜을 꺼내 그대로 액정에 긁었다. 이런데 오면 으레 시인이 되기 마련이니까.


법계사 근처에서 멍 때리며 사색 다운 사색을 했다. 바위와 나무와 풀밖에 보이지 않는 곳, 근심 걱정도 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나치게 한 곳에서 어슬렁 거리는 것은 모처럼 찾은 지리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서둘러 칼바위 쪽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내려가야 하기도 하고, 여차하면 법천 폭포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폭포라 하기엔 귀여운 사이즈이지만 상상력을 총동원해보면 정방 폭포도 보였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삼겹살 구울 힘이 없어, 백숙을 시켰다. 국물을 연거푸 몇 숟가락 떠먹고 나니, 오싹했던 몸이 녹는 듯했다. 압력솥에 제대로 삶았는지 국물에 잠긴 뼈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니 흐느적거리던 살이 물통에 물 번지듯 풀어지고 있었다.


'까톡'


잽싸게 카카오톡 비밀번호를 풀었다.

철아 전화 못 받아 미안하다. 결국, 가족행사를 빼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다.

자리 배치도 균형감이 있다던 과장이 갑자기 화성 연무대에서 활쏘기를 했었는데 너무 좋았다며, 지방청 잔디밭 넓으니까. 시시껄렁한 행사보다 제대로 된 활쏘기를 해 보면 좋겠다며 무릎을 치며 신나 해하더라.

그래서 연무대 측에 문의도 해보고, 혹시 몰라 국궁협회 측에 연락도 하면서 활과 과녁 같은 장비를 빌릴 수 있는지, 아예 참여를 해서 시범을 해줄 수 있는지 등 알아보았지, 관계자들은 안전요원의 비용과 대여료를 지급해 주면 큰 문제는 없다고 했지.

그렇게 들고 부장에게 갔더니..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쁘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차장에게 갔거든. 그런데 차장이 인상을 팍 쓰면서 그랬어.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요 라고. 이 말 한마디에 원점 검토는 불 보듯 훤했지.

차장 방에서 나오는데 부장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길래, 차장이 위험하지 않겠냐고 했다고 했더니 자신도 사실 그 점이 거슬렸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다고 말하더라. 사무실로 돌아와 과장에게 고하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위험하지는 않을 텐데... 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그러면서 저녁 먹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야.

밥알 삼키면서 청장에게 칭찬받을 수 있을만한 가족행사가 뭐가 있을까. 게임은 뭐가 재밌을까. 경품은 어떤 게 좋을까 생각했어. 그러다 스파크가 일어나며 효자효녀상 시상식이 어떨까 싶은 거야. 청장이 훈훈한 장면을 좋아하고 마침 가족들도 모이는 자리이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거지.

먹는 둥 마는 둥 식판에 남아 있던 음식을 버리고 급하게 사무실로 뛰어갔어. 계장과 과장은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더라.

이번에는 계장을 앞세우고 부장에게 갔어. 부장은 조금 전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수상 대상자 선정, 소요시간, 배경음악, 파급효과, 지속가능성 등 꼬치꼬치 캐묻더니 가족행사 취지에 걸맞은 일이라며 호응해주었어. 이제 차장만 오케이 해주면 끝나는 거였지.

노크를 하고 차장실에 들어가니 부속실 직원이 지금 통화 중이라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거야. 계장과 나는 얼굴을 마주치며 눈웃음으로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지. 그때 방에서 문이 열리며 차장이 나오는 거야.

계장과 나는 목례를 하고 검은색 결재판을 벌려 계획안을 꺼내 차장에게 건넸어. 기안 서류를 쳐다보던 차장은 조금 전 청장과 통화를 했는데 가족행사는 이미 5월에 했으니 비슷한 행사를 두 번 할 필요가 있겠냐며 다른 성격의 행사를 추진해 보라고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일단 퇴근하고 내일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

집에 가고 있는 길이다...

아... 삼겹살에 막걸리...




여관방 욕실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풍덩하고 들어갔어. 천왕봉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오랜만의 산행으로 욱신거리던 뼈마디가 스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캔맥주 하나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 물속으로 머리를 담갔어.


나름 펜대 좀 굴린다는 놈들이 몰린 곳에서... 파출소에 수도 없이 떨어지는 공문서나 지시 문서들 저런 식으로 생산해 냈을 텐데... 그나마도 현장 실정에 맞지도 않은 엉뚱한 것들 천지니...


"푸핫!"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솟구쳐 나온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 쉬었어. 이래 가지고 죽겠냐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ᆞᆞᆞkantrolᆞᆞ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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