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 마니아
내가 아는 여섯 살 여자 어린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당연히 모두 뚱이의 친구들이다. 일하는 엄마이므로 점점 뚱이의 친구들을 직접 만나기가 힘들다. 그래서 뚱이와 놀며 늘 궁금하다. 이 놀이가 여섯 살에게 인기가 있는 건가? 뚱이는 유치원에서 무슨 놀이를 할까? 친구와 노는 뚱이는 어떤 모습일까? 등등.
뚱이는 요즘 상황극에 심취해 있다. ‘상황극’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최근 우리는 도미노 게임을 한 세트 샀는데, 그 구성품에는 도미노 블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통형의 기둥을 타고 구슬이 내려오면 도미노 블록을 밀게 되고, 도미노 중간중간에 물레방아, 계단 등도 놓을 수 있다. 뚱이와 함께 집중해서 몇 개의 코스를 만들고 나면 시간도 잘 가고 재밌다.
그런데 뚱이는 이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놀이에 문과의 감성을 한 사발 넣었다. 이 놀이는 우리 집에서 ‘구슬이의 대모험’이라는 대주제를 갖게 되었다. 뚱이가 딱히 제목을 붙인 것은 아니지만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 도미노 세트에는 구슬이 8개 들어있다. 뚱이는 각 코스에 구슬을 배치하고는 도미노를 쓰러뜨릴 때마다 외친다. “구슬아, 힘내!” 뚱이가 평범한 장난감 구슬에 이름을 부여한 순간부터 구슬들은 무대 위의 인물이 된다. 무대 위의 구슬이 8형제는 힘을 내서 각 코스를 여행한다. 도미노 코스는 때로는 구슬이 형제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수영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 상황극의 끝판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레고’다. 뚱이의 레고 놀이에는 모험과 서사, 주조연급 등장인물들의 갈등, 시트콤에서 볼 법한 재미가 연출된다. 그 안에서 엄마인 나는 굉장히 많은 역할을 맡는다. 얼마나 역할이 많냐면, 남편에게 인수인계가 불가능할 정도다.
엄마와 레고를 갖고 놀던 뚱이가 같은 놀이를 아빠와 이어서 하기란 매우 힘들다. 내가 다른 할 일이 생겨서 남편과 교대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남편에게 장황한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
“얘랑 얘는 자매야. 하나는 중학생이고 하나는 유치원생이야. 이름은 뭐고, 학교 끝나면 동생을 데려다줘야 하는데, 엄마는 어디 있냐면…” 이쯤 얘기하면 남편은 머리가 어지럽고, 나는 난감하고, 뚱이는 속상하다.
남편이 제일 접수하기 힘들어하는 포인트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외모를 구분하는 일이다. 뚱이는 레고 프렌즈‘만’ 갖고 논다. 그냥 레고는 뚱뚱하고 못생겼다나. 레고 프렌즈에는 예쁜 눈코입도 있고, 멋진 옷과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있다. 그래서 레고 프렌즈를 열심히 사고, 선물 받고, 중고로 대량 구매한 덕분에 뚱이 방에는 비슷비슷한 얼굴의 레고 사람이 꽤 많아졌다.
문제는 뚱이가 보기에는 각 인물들이 얼굴도 머리 모양도 옷도 다르므로 다 다른 사람인데, 아빠에게는 모두 거기서 거기인 얼굴들로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수십 개의 핑크 립스틱을 보여주며 뭐가 더 예쁘냐고 묻는 여자와 물음표를 백 개 띄운 남자를 보는 느낌이랄까.
내용이 얼마나 복잡하길래 인수인계를 하다가 지치는 걸까 궁금하다면 아래의 사진을 보면 된다. 사진에 이어서 인물 관계도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모두 세 가족이 등장한다. 하늘색 성은 마야네, 시계방향으로 로미네, 메리루네가 모여 산다. 맞다. 티니핑의 등장인물 이름을 빌렸다.
1. 마야는 엄마 아빠와 산다. 마야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2. 메리루는 부모님, 동생 루카가 있다. 메리루 아빠는 태권도 관장님이다. 2층 건물의 1층은 태권도장, 2층은 집이다. 메리루는 체대 졸업 후 보조 사범으로 일하며 아이들 픽업을 도맡는다.
3. 로미네가 가장 복잡한데, 부모님에 동생 둘이 있다. 로미 동생은 뚱이와 크크다. 로미네 집은 승마장(2층)과 카페(3층)를 운영한다. 로미 엄마인 엘리드 선생님은 승마 학원 원장님이고 로미는 유능한 강사다. 둘째인 뚱이는 루카와 친구이며 태권도는 검은띠고 뭐든 잘하는 알파걸이다.
오른쪽 하단에 있는 같은 디자인의 핑크색 상의가 승마장 유니폼인데, 이중 엄마인 엘리드를 구별하는 것이 인수인계의 최대 난제 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한 10번까지 설정이 이어진다.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사랑과 우정, 어른들의 직장 생활, 학원 다니는 어린이들의 에피소드들이 매일 조금씩 다르게 반복된다. 이 스토리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뚱이의 짝꿍으로 집에 초대하고 싶다.
뚱이 방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이번 여름에는 레고 놀이를 자주 하지 못했다. 그 덕에 뚱이는 레고에 밀려 선택받지 못했던 놀이를 종종 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옷 입히기 스티커다. 여름 내내 뭐든 다 있다는 잡화점에 있는 코디 어쩌구 스티커를 정말 다양하게 사서 갖고 놀았다.
여기에도 상황극이 빠질 수는 없는 법! 뚱이는 옷 입히기 스티커를 사면 일단 전부 뜯어서 다 붙여 놓는다. 속옷 차림인 인물이 하나도 없도록 옷을 다 붙인 뒤에는 엄마와 무한 설정에 돌입한다.
며칠 전, 나는 종이 인형을 들고 그런 대사를 말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우주에 대해 연구하는 우주인이셔. - 내가 맡은 인물의 엄마가 뭘 연구하는 박사였는데, 대충 그런 대사를 말했지 싶다.
뚱이가 맡은 인물의 엄마는 요정이라는 정체를 숨기고 지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내 대사를 들은 뚱이가 이어서 말했다.
너희 엄마는 우주인이시구나. 우리 엄마는 카페인이셔!
아, 이 말이 얼마나 웃기던지. 나는 그 ‘카페인’이라는 말에 꽂혀서 한참을 웃었다. 동네 카페 사장님들께는 죄송하지만, 한동안 카페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서 수상한 사람처럼 혼자 킥킥댔다.
뚱이와 하는 상황극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버겁고 지칠 때도 있다. 외동인 뚱이에게 언니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여섯 살의 놀이가 나에게 매번 재밌을 수는 없다. 그럴 때 ‘카페인’처럼 의외의 말과 행동으로 나를 웃겨주는 것 역시 뚱이다. 출근하자마자 공복에 카페인을 충전해야 하는 바쁘고 피곤한 엄마지만, 이런 순간이 나를 웃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