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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본 Oct 20. 2021

제임스 휘슬러 <베니스 운하에서>

with 진실 / 박노해

큰 사람이 되고자 까치발 서지 않았지
키 큰 나무숲을 걷다 보니 내 키가 커졌지
 
행복을 찾아서 길을 걷지 않았지
옳은 길을 걷다 보니 행복이 깃들었지
 
사랑을 구하려고 두리번거리지 않았지
사랑으로 살다 보니 사랑이 찾아왔지
 
좋은 시를 쓰려고 고뇌하지 않았지
시대를 고뇌하다 보니 시가 울려왔지
 
가슴 뛰는 삶을 찾아 헤매지 않았지
가슴 아픈 이들과 함께하니 가슴이 떨려왔지
 
- 진실 / 박노해 - 




자연스레 시간이 흘러가듯, 나이도 자연스레 들어가고 싶다.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에 나를 맡겨도 보고 싶다. 무언가를 갈구하며 부자연스러운 틀에 나를 맞추려 욕심 부리지 않고 싶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그 시간에 편승해 나도 흘러갔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한 때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경주마처럼 달렸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도 작은 목표라도 삶의 목표가 없으면 길 읽은 강아지 마냥 어찌할 바는 몰라 허둥거린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인생임을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그렇다고 인생의 목표나 꿈,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 흘러가는 시간과 삶의 여정에 따라 조금씩 변경될 수 있음을 알고, 더 이상 규격화된 틀에 맞지도 않는 나를 구겨 넣어 맞추려 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욕심을 버려도 보고, 또 새로운 욕심으로 채워도 본다.
 
버리고 채우고, 또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다보면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온다. 참으로, 시간이란 정체되기도 하고 빠르게 요동치기도 하는 내 안의 시계와 달리 정직하다. 그리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럼에도, 또 다른 목표를 세워가는 것 또한 인생인가 싶다. 


제임스 애벗 맨닐 휘슬러 <On a Venetian Canal> (1903), 수채화


위 작품은 미국 태생으로 영국과 파리에서 활약한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가 그가 사망한 해에 남긴 수채화다. 그림이 그려진 35년 전, 그는 14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70세가 되어 그 시절의 베네치아를 화폭에 담았다. 수채화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그가 추억하는 베네치아의 배경과 어울려 따뜻한 감성을 자극한다. 멀리 보이는 돔 지붕의 건물, 운하를 가로지르는 건물들, 그 사이로 유유자적 떠가는 곤돌라 한 척이 그가 죽을 때까지도 아련하고 좋은 느낌으로 간직했을 베네치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짙고 선명한 유화가 아니라, 은은한 색체가 매력적인 수채화 작품이라 더욱 배네치아를 향한 휘슬러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다.
 
휘슬러가 베네치아에 도착한 것은 1879년, 의뢰받은 에칭 12점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그는 그곳에서 작품 완성 후 빠르게 런던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바뀌어 버렸다. 베네치아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목표는 변경되었다. 휘슬러는 이 곳에서 14개월간 후미진 운하, 쓰러져가는 귀족들의 호화저택, 사적인 마당 등을 여행하며 에칭을 비롯해 소묘, 파스텔, 수채화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1880년 런던으로 돌아 온 후에도 배네치아를 소재로 작품을 이어갔으니, 베네치아를 향한 휘슬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휘슬러의 베네치아는 말해준다.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계획한 목표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는 길에서 가슴 떨리게 하는 무언가를 만나면 잠시 들려도 되고, 또는 노선을 변경해도 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흘러가는 감정에 이끌려가는 것에 죄책감을 갖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시간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그 삶 속에서 또 다른 결과물로 이어질 새로운 목표를 만날 수도 있으므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진실>에서 시인이 마주한 큰 키와 사랑, 행복과 좋은 시의 가슴 울림처럼. 삶을 살며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분명 있다. 휘슬러의 베네치아 처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느 누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존재한다. 난, 그렇게 믿는다.   


인생에는 서두르는 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이 있다
- 마하트마 간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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