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고 방학이어서 늦게까지 잠을 잘만도 한데 아이들은 눈이 오시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반짝 눈을 떴다. 아이들은 서로를 부르며 모여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까닭도 없이 웃어댔다. 웃다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하얀 눈을 받아먹으려 애썼다.
눈송이는 머리카락에 광대뼈에 빨개진 볼에 하얗게 꽃처럼 내려앉았다. 가끔 속눈썹에 떨어진 눈송이는 유독 차갑게 파르르 떨다가 눈물처럼 눈 속에 고였다.
은수와 경애, 은석이와 종숙은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굳이 편을 나누지 않아도 은수와 경애가 한 편이 되었고, 은석이와 중숙이 다른 한편을 먹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두 손으로 꾹꾹 눈을 뭉쳐 던졌지만 이내 대충대충 그러모아 상대방 코앞까지 가서 눈을 뿌리듯 던지고 휙 돌아섰다. 돌아서는 아이를 눈에 맞은 아이가 잡고 놓아주지 않아 실갱이가 벌어질 때 또 한 바탕 웃음이 터졌다.
경애와 종숙이는 신이 나서 서로를 잡고 잡히며 뛰어다녔다. 하얀 눈 속에 경애와 종숙의 모습이 멀어져 가고 웃음소리만 남았다. 아마도 경애와 종숙이는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 윗뜸까지 갈 것이고, 명희와 석훈이와 재필이와 만나 아침밥을 거른 것도 잊은 채 정오가 다 될 때까지 놀지도 몰랐다.
은수와 은석은 경애와 종숙에게 함께 가겠다고 떼쓰거나 조르지 않는다. 은석이 탱자나무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은수도 은석이도 각자의 누나와 언니 외에 놀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은수에겐 은석이라는 동무가 생겼고, 은석에겐 은수가 동무가 되어주었다. 사실 은수와 은석은 경애와 종숙이와 놀다 보면 그냥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놀이에 끼게 되어 누나들은 누나들대로 재미를 잃었고,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흥이 나지 않았다.
경애와 종숙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은수와 은석은 세상이 함박눈 속에 갇힌 것처럼 고요해지자 어리둥절했다.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 같은 쓸쓸함과 적막감.. 동시에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같은게 밀려와 서로가 더 없이 귀하게 여겨졌다.
은수가 눈을 모아 야무지게 꼭꼭 눌러 만든 공 하나를 은석에게 주고, 남은 하나를 눈 위에 굴렸다. 은수가 은석에게 오빠처럼 해봐라고 말하듯이 은석을 바라보며 웃는다. 은석이 은수를 똑같이 따라 눈을 굴린다. 주먹만 했던 공이 얼추 축구공만 해졌다. 은수의 눈덩이가 어느덧 지난여름 할머니가 지붕에 올려 키운 박 만해졌다. 눈덩이가 바닥을 구르면서 흙도 따라 공에 붙었다. 은수와 은석은 하얀 눈을 모아다 살이 드러난 것처럼 흙이 붙은 눈덩이 위에 하얀 옷을 해 입히듯 붙여준다. 은수와 은석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은수가 굴린 커다란 눈뭉치 위에 은석이 굴려 만든 축구공만 한 눈뭉치를 올린다. 혹시라도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눈뭉치가 부서지지 않을까 조심조심하며 눈사람의 얼굴이 될 부분을 몸통에 조심조심 단단히 붙인다. 은수와 은석은 눈사람의 얼굴에 눈, 코, 입이 되어줄 것들을 찾아 나선다. 주워온 숯조각은 눈사람의 눈썹이 되고 작은 나뭇가지는 코가 되고 동그란 돌멩이는 눈과 입이 되었다. 퍽 예쁜 눈사람이 은수와 은석을 마주 본다.
은수와 은석은 저희 들이 만든 눈사람을 보며 뿌듯해하며 마주 웃는다. 할머니가 삽짝 바깥으로 나와 아이들을 부르지만 눈송이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삼키는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먼 데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할머니가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아이들은 할머니를 향해 뛰어간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그만 어서 들어오라고 큰 소리로 불러놓고는 아이들이 냅다 뛰는 모습에 넘어질까 얼른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뛰면 안 된다고 소리친다.
아이들의 손에서 뜨게실로 연결된 장갑을 벗기고, 목도리를 풀어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준다. 장감에도 목도리에도 하얀 눈이 밥풀떼기를 뭉쳐놓은 것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조금씩 몰려드는 한기에 아이들이 감기라도 들릴까 할머니는 아궁이 앞에 은수와 은석이를 끌어다 나란히 앉힌다. 타닥타닥 장작타들어가는 소리에 맞춰 솥단지 안에서 밥알이 익어가는 소리가 하얗게 올라오고 은수와 은석의 몸에서도 차갑지만 즐거운 웃음소리가 하얗게 수증기를 따라 올라온다. 은수와 은석은 할머니가 아궁이 재에 묻어놓아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를 호호 불며 먹다가 검댕이가 묻은 손으로 코밑을 문지른다. 은수와 은석은 군데군데 까매진 서로의 입 언저리를 가리키며 또 한 번 까르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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