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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May 16. 2021

어른같은 아이, 아이같은 어른


지난 중간고사 기간.

국사 시험공부를 하던 딸이 말했다.


“아니 무슨 헌법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바꾼대? 이럴 거면 제헌절은 왜 만들었대.”


현대사 부분을 공부하다 슬슬 열 받아하는 딸.


“동아일보 뭐야? 친일이었다 친미? 신탁통지 찬성한 나라를 고의적으로 바꿔 보도해? 뭐 이런..”


엄마는 제주 4.3 사건이 7 동안이나 계속된  알았어? 그래서 그 마을엔 살아남은 사람이 없대. 끔찍해.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이렇게 하지?”


공부를 하는 건지 성토대회를 하는 건지 모를 딸의 이야기 덕분에 나도 뒤늦은 현대사 공부를 했다.


학창 시절 국사는 내가 좋아하던 과목이었다. 여고에 몇 안 되는 총각 선생님 과목이기도 했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우는 국사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사건들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바꿀 수 없는 너무 암울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은 그런 역사를 하나하나 집어 가며 그 사건들의 이면을 배우고 있었다.


“엄마는 5.18 민주화 항쟁을 언제 알았어?”

“엄마 때는 그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나온 적은 없었어. 뉴스를 보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나오더라도 북한이 선동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왔지. 근데 엄마 고등학교 때 시장 옆 담벼락에 5.18 실상을 알리는 대자보 같은 거 본 적 있어.”

“진짜?”

“응. 근데 엄마는 그게 꼭 간첩들이 붙여놓은 거 같아서 무서워서 얼른 도망갔어. 그때는 그렇게 교육받았었거든. 지금 보면 그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데 그땐 그걸 몰랐지.”

“그렇게 통제가 가능했다는 게 참 신기해.”

“지금이라고 뭐 크게 다르진 않을걸.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지. 예전엔 아예 소문이 나지 못하게 했다면 지금은 거짓 뉴스를 퍼트려 어떤 게 진실인지 헷갈리게 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어떻게 우리나라는 그렇게 많은 대통령이 나왔는데 하나같이 한 일이 똑같아. 다 자기만 생각하고.”

“그래도 할아버지 같은 분은 전두환 때가 살기는 더 좋았다는 소리 하신다. 나 먹고 살기에는 그때가 더 좋았다고.”

“그래? 할아버지는 이런 일들을 모르셨나?”

“그때는 모르셨겠지. 나중에는 아셨겠지만.. 근데 사람들이 그렇다. 자기 먹고살기 힘들면 그렇게 되더라.”

“유신정권, 5.18 민주화 항쟁을 알고도 그 사람을 뽑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딸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닌  같아.”


딸의  마디에 가슴이  했다. 나는 살면서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 일들을 외면해 왔다. 아닌 걸 알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냐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지 않겠냐는 마음을 덮어버렸다. 내가 나선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지 않냐고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화하면서..

그런데 이제 갓 투표권을 얻은 딸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냐는 다른 이들의 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 일에 분노하고 잊지 않으려 하고 나만이라도 바뀌려고 애를 쓴다. 그런 딸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저러다 부러져 다치는 건 아닌가 싶어 조금은 모른 척 편하게 살라고 하고 싶다. 한편으론 그래도 그건 아닌 일에조차 분노하지 못한 어른의 마음은 부끄럽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더니 40이 넘어도 여전히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나보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딸이 더 어른스럽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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