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가 박찬선 Jun 26. 2017

느낌이 있는 하루

만약에 

만약에     


우리의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살아갈 장소를 선택한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항상 선택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는 동안 “만약에”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에” 라는 말을 들을 때 항상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1918년 여름, 종군기자 신분으로 참전했던 열여덟 살의 앳된 청년이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의 공습을 받아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남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여자의 맑고 그윽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한마디…….     

“사랑해요.”     

이 한마디의 말에 얼마나 많은 진심이 담겼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여자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따뜻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여자의 눈에 남자는 어린 청년일 뿐이었다.     

얼마 뒤 청년의 상처에 염증이 생겨 고름이 차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담당 의사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간호사였던 그 여자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직 어린 청년에게 평생 한쪽 다리가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두 시간마다 정성을 다해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밤낮으로 고생한 덕분에 염증이 사라지고, 남자는 목발을 짚고 병실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와 마주칠 때마다 “꼬맹이, 이제 고향에 돌아가서 여자 친구랑 춤을 출 수 있을 거야.”라고 놀렸다. 그때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며 “난 고향에 있는 여자애들이랑 춤을 추고 싶지 않아요. 내가 춤을 춘다면 오직 당신하고만 출거예요”     

여자는 남자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여자를 쫓아다녔다. 시간이 흐른 후, 여자는 다른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남자의 다리도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급하게 떠나느라 남자에게 작별인사도 못 하고 편지 한 장과 끼고 있던 반지를 남긴 채 사라졌다.     

어느 날 목발을 짚은 남자가 여자 앞에 나타났다.     


“내일 아침, 6시 기차로 떠나요. 난 미국으로 돌아가요. 기차역 앞에 있는 여관에서 기다릴게요.”     


남자도 부대의 명령에 따라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작고 허름한 여관방은 문을 닫으면 금방 사랑의 낙원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발등에 올라가 그를 안고 춤을 추었다. 그날 밤 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왈츠의 선율 속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다.     

다음날 새벽, 해가 뜨자 남자와 여자는 서로 반대 방향 기차를 타야했다. 여자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향해 갔고 남자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자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빨리 말해 줘요, 난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여자는 “나도 사랑해요”라고 목청껏 외치고 싶었지만 입속에서만 맴돌고 말았다. 귀국 후 남자는 열심히 여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늘 여자의 안부를 걱정했고,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 할 집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의 답장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여자는 오랜 고민 끝에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를 선택한 것이다.     


남자는 고향 집 근처의 호숫가에서 매일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봐 주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받아줬던 여자가 왜 행복을 앞두고 갑자기 마음이 돌아섰는지…….     

약혼식 날, 약혼자의 손을 잡고 왈츠를 추던 여자는 갑자기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남자와 왈츠를 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 순간 여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 그 남자를 뼛속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집을 꾸려 이탈리아를 떠나 그 남자가 있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호숫가로 찾아갔다. 이제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랑해.”     


그러나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난날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


“내 마음은 지금도 널 간절히 원해.”     


여자가 눈물을 흘렸지만 남자에게는 그 여자를 받아 줄 열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남자는 여자와 이별한 후, 고집스럽고 괴팍한 마초가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노벨 문학상까지 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자는 평생 네 번 결혼을 했고 예순 두 살의 나이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이야기 속의 남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다. 그리고 여자는 아그네스 폰 쿠로보스키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옛 사랑을 잊지 못하다가 서른여섯 살에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국제 적십자에서 일하면서 간호사 최고의 영예인 나이팅게일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70여 년간 그는 가장 깊은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난 70년 동안 줄곧 그를 떠올렸다. 만약에 그때 그 사람이 날 받아줬더라면, 나중에라도 다시 날 찾아왔더라면 우리의 운명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운명은 언제나 수많은 만약을 남기는 법이다.”     


“만약에”라는 말에는 늘 깊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만약에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만약에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선택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 좋은 선택은 지혜로움에서 온다. 지혜는 분별력이다. 그리고 분별력은 깊은 사고와 훈련을 통해 얻어진다.


“만약에”라는 말에는 늘 깊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느낌이 있는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