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를 책으로 만든다는 것
책이 출간된다는 것은 ‘책을 만드는 데 돈을 쓰겠다’는 누군가의 의중이 반영되기 때문이고, 그렇게 ‘돈을 태운다’는 것으로써 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이야 충무로에 가면 “단 한 권의 책도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업체를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출판의 역사에서 책을 출간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라서 그렇다.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작가에 의해 원고가 완성되어야 하고, 그 뒤에는 출판경험이 있는 편집인에 의해 원고가 편집되어야 하며, 마침내 전문인력들에 의한 조판과 인쇄 그리고 제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라서, 당연히 돈이 든다는 걸 의미한다. 이 적지 않은 돈을 누가 사서 읽을지도 모를 책에 ‘태운다’는 것은 당연히 ‘모험’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나서는 이의 평가로 인해 책으로 출간한다는 행위에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기자들이 책을 쓰는 건 아니다. 이유는 뻔하다.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이야 부정할 수가 없다. 기자라는 업業 자체가 글 쓰는 것이고, 글을 못 쓰려고 해도 윗사람에게 욕먹어가면서 배운 생업이라서 생래적으로 불가능하다. ‘정해진 지면’에 쓰이고, ‘일반인 독자’가 쉽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 글이 기사라서, 다소 ‘정형定型적’이면서도 ‘전형典型적’인 글쓰기가 되는 약점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뻔한 글쓰기’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첫째, 기자는 글을 ‘정형적이면서도 전형적인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다양한 글을 쓰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쉽고 정확하게 읽혀야 하는 글을 써야 하는 일이라서, 문학을 위한 미문을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공문 잘 쓰는 공무원이 문필가 소리를 들을 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간혹 파격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르포르타주나 칼럼을 써볼 수 있는 기회도 있겠지만,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잡지의 ‘에디터’라면 좀 더 나을까 싶을 텐데, 거기도 ‘일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사’를 쓰는 건 마찬가지다. 출판사 편집자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 보니,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냥 기자, 에디터, 편집인으로 호구책을 삼은 문학 작가가 존재할 따름이다. 게다가 기자는 ‘글 쓰기 전문가’가 되기도 어렵다. 업을 표현 하는 말이 ‘글을 쓰는 자’라고 규정한 것과 다르게, 기자의 업은 되레 ‘취재력’에 본질을 가진다. 기사를 쓰는 건 차순위이고, 기사를 쓰기 위한 실질적 내용을 ‘모으는’ 일이 기자란 업의 정수란 말이다. 그래서 취재원에 접근해서 정보를 그러모으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 혹자들은 기사를 발로 써도 되지만, 취재는 다르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정보과 형사처럼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의 유대관계를 맺어 정보를 취득해 내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거다. 그러니 글쓰기 전문가보다는 대인관계 전문가로 성장하는 게 더 쉽다는 말이다.
둘째, 기자는 ‘전문가’가 되기 어렵다. 보통 회사원들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업무 영역의 일과 아카데믹한 경력 루트를 병행하기가 어렵다. ‘9 to 6’의 루틴을 지키기 어렵다 보니, 학업을 병행한다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게 가능해질 연차가 되면 ‘가정 내 자원 배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를 내 대학원 석박사 학비보다는 아이들 학원비에 투자하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게다가 어느 분야의 아카데믹 경력을 쌓느냐도 고민일 텐데, 언론학 분야는 아예 해외 대학에서 박사를 받아오는 애초의 학자 트랙 경력자에게 밀린다. 그렇다고 해당 취재 분야를 전공하는 것도 위험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취재 분야를 잘 알 수는 있어도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순 없게 된다. 의학 전문 기자라고 해서 의사 취급해 줄 리가 없고, 문학 전문 기자라고 해서 비평가 취급해 줄 리가 없다는 거다. 아주 특수한 예외로, 등단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비평이나 시사비평은 좀 다를 수는 있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이 되려면 일반인보다 나은 인사이트를 담고 있어야 하고, 그 정도의 질을 담보하려면 ‘준전문가’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 잘 다루던 것을 다룰 수밖에 없고, 그건 역시나 평상시 쓰던 기사에 녹아 있을 터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들의 심층취재 연속 기사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방치된 믿음 : 무속 대해부>라는 이 기획기사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무속의 현주소 조명”한다고 한다. 총 13개의 기사로 구성되었는데, 적절하게 재배치해서 책이 되었다.
1. 굿판을 걷어차다
{2장} 귀신같이 알아맞힌 그 말, 삶을 저당잡는 미끼였다
{1장} 가족들 위해 신내림 받았지만... 두 딸은 차례로 정신병에 걸렸다
{9장} 달나라 가는 AI 시대에 무속이 공존하는 이유는
2. 사람 잡는 무속
[3장] "굿하면 다 낫는다" 고통을 먹잇감 삼아…귀신 대신 사람 잡은 무당
[6장 후반] "유튜브 영상 속 무당 점사는 짜고 치는 쇼"… 대역 배우의 폭로
3. 기도터 가는 이유
[4장] '기도발' '복' 그리고 '쩐'... 무당 70명이 그날 대관령 오른 이유는
[9~10장 사이 인터뷰] K샤머니즘 전문 이스라엘 교수 "한국은 교인도 점 보는 나라"
4. 산업화된 점집
{5장} 미아동 떠나 논현동서 수억 수익… 점집도 '강남불패'
[6장 전반] 진로·취업·결혼… '초고속 온라인 점술' 호황… 신뢰성은 의문
[10장 후반] "30만명 넘는다"는 무당… 정부엔 '없는 사람들'
5. 시대와 공존하려면
[8장] "참된 무당은 고통받는 이들의 나침판… 신 무서운 줄 알면 나쁜 짓 못해"
[10장 전반] 무속인 왜 안 좋게 보냐고? "돈만 좇는 모습에 실망"
[7장] "전 세계 고객에 점 봐줘"... 한국서 신내림받은 '푸른 눈의 무당'
무당들은 주로 점사와 굿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무당집 앞에는 대나무 장대에 흰색과 빨간색의 깃발이 걸려 있는데, 흰색은 점사를 빨간색은 굿을 의미한다. 천왕기(天王旗) 또는 서낭기(城隍旗)라 하는 이 깃발은 고대 소도에 꽃혀 있던 깃발[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 한민.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저녁달. 2024. 194쪽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한국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이 책을 굳이 펼쳐봤을까 자문해 봤다.
종이 신문으로 읽을 리 없는 기사지만, 웹페이지를 통해서라면 살펴봤을 기사다. 그런데 우리 같은 ‘꼰대’들은 액정화면보다 종이를 선호하는 편이다. 전자책보다는 그냥 종이책이란 말이다. 나보다 조금 더 꼰대들이라면, 아마도 A4용지에 프린트해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프린트해 줬다가 글자 작다고 욕먹는 사람 여럿 봤다. 그러니 기왕에 종이책으로 잘 묶여 나온 게 있는데, 굳이 액정화면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거다.
7쪽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무속이 존재함에도 제도적으로 무속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방치된 믿음’의 현주소다.
이 책은 무속 신앙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한 시도는 아니다. 무속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이 책의 머리말은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이성하 기자가 대표로 작성했다. 이 머리말에 따르면, “무속인은 누구이고,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해 보고 싶”어서 이 기획기사가 나오고, 책이 엮어졌다고 한다.
무속에 대한 저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중립적’이다.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고 말하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이 무속에 정통한 종교학자도 아닌데, 쉽게 선언할 수 없는 문제라서 그렇다. 무엇보다 취재원인 무속인들을 자극할 수 있는 태도를 갖기도 어렵다. 대체로 기자 사회는 취재원과 유착되는 경우가 잦은데, 인간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로버트 자이언스의 단순노출효과 mere exposure effect도 한몫하겠지만, 인간이라면 보통 호혜성의 원칙 norm of reciprocity에 얽매이게 된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하는데, 취재에 응해준 취재원의 뒤통수를 치긴 어렵다. 그러다가 동일시 identification이 종종 일어나서, 취재원에 친화적인 태도를 형성하기까지 한다. 꽤 독종이 아니고서야,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먼저 무속인에게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의 삶을 ‘서사적’으로 예시한 뒤에, “무속 범죄 10년 치 판결문 320건을 전수 분석”한 내용을 가져왔다. 이것이 ‘1부 미끼를 물다’의 주된 내용이다.
‘2부 현실의 무속, 무속의 현실’은 “기도터를 찾아 무속 관계자를 무작위 인터뷰”한 것이나, “네이버 지도에서 점술 관련 업체를 크롤링 기법으로 추출한 뒤 분석 프로그램을 사용해 정리”한 것, “건강한 신념을 가진 무당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무속 신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려고 실시한 “정순덕, 김규리, 김연옥 만신의 심층 인터뷰”를 실었다.
‘3부 무속 길들이기’에서는 “정부가 방치하는 무속의 실태도 확인”하려고, “무당 12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것을 실었다.
한국일보의 신문 기사이다 보니, 깊이도 깊지 않고 폭도 넓지 않다.
일반 독자를 상대로 한정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신문 기사’의 태생적 한계다. 르포르타주 reportage와 기획 기사 feature article로 깊이와 폭을 조금 강화할 수 있긴 했지만, 그래봐야 신문기사라는 말이다.
신문기사의 깊이는 주로 인용을 통해 나온다. 기자가 아무리 잘난 듯 써봐야 ‘너 뭐 돼?’라는 반문이나 듣게 되기에,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하게 된다. 3부에서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 점복문화연구소 염은영 소장, 서강대 K종교학술확산연구소 김동규 연구 교수, 텔아비브대 동아시아학과장 리오라 사파티 교수 등을 인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물론 이 인용들은 기사의 맥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수집’된다. 따라서 기사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문가의 소견은 삭제되기도 한다. 논문을 쓸 때처럼 엄격한 동료 검증 peer review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기사에 동원되는 인용은 조금 더 자의적일 수 있다.
그래서 그 ‘깊지도 않고 폭도 넓지 않음’이 대중서의 미덕이 될 수 있다. 종교학자나 문화학자들이 골머리 싸매고 쓴 학술서라면,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 무척 어렵다. 지레 겁먹고 책장을 펼쳐볼 엄두조차 못 낸다. 그러니 누구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입문’할 수 있는 읽기 쉬운 대중서는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그들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냐’며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173쪽
사람들이 무속에 빠지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한 심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텔레비전이나 주변 사례를 보며 ‘어떻게 저런 일에 속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무속을 찾는 피해자는 대부분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자존감이 낮거나 반복된 실패를 겪은 이들이 많으며 삶의 방향을 잃은 채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특히 트라우마나 상실을 겪은 경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강하게 작용한다. 결국 무속인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처한 심리적 조건이 그들을 쉽게 속도록 만든다. 무속 사기는 무속인의 기술이 아니라 취약한 피해자의 심리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편협한 존재이다 보니, 심리학적으로 사기 범죄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를 쉽게 보이곤 한다. 사람들은 사기 피해자를 비난함으로써, ‘세상은 공정하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자기 불안을 줄이며, 자기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능력이 있다고 과신하게 되며, 그로써 피해자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자리매김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된다.
따라서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이런 목소리가 등장하게 된 더 넓은 맥락의 교차점에 주목”하라고 충고하는 릴리 출리아라키의 조언은 반드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2장 이상한 말 하면 안 믿으면 되잖아>와, <취재 후기 무속이 정말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을까>에서 저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일 테다.
59쪽
어머니는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딸과 사위를 탓하지 않았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들의 버팀목이 돼 주었던 셈이다. 동생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될 때 누나를 적극 도왔다. 가스라이팅 피해자가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하는 데 있어 가족의 지지와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시 이번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다.
이 책에서는 무속인 인구를 30만 명으로 어림잡고 있지만, 문화심리학자 한민의 책,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에서는 80만 명으로까지 추산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20만 명에서 4배 가까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일도 벌어진다.
113쪽
무당들은 과잉 신내림굿 문제를 알고 있었다. 신을 내려 무당으로 만드는 신내림굿은 굿 중에서도 가장 비싸다. 이 돈을 노리고 무속인이 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신을 받아야 한다고 겁을 주는 무당이 많다는 것이다. 신굿이 극성을 부리다 보니 무당들이 이른바 신제자를 양산하고 그 제자들이 다시 제자를 양산하는 ‘무당 피라미드’까지 생겨났다.
거의 모든 전문가 집단이 그러하듯이, 무당 역시 내림굿이란 어려운 입문 과정을 통해 도제를 선별하고, 신어미니-신딸이란 도제 시스템을 통해 장기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래야만 굿과 같은 ‘의례’를 ‘규범’에 맞춰서 수행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프랜차이즈의 시대’에는 그런 도제 시스템이 먹히질 않는다. 장기간 하나의 제자를 양성하는 방식으로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신딸들을 ‘비숙련노동자 상태’로 방치하며 ‘종속적 자영업자’인 ‘가맹점주’로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제도적 사각’의 문제다. 이 책에서는 ‘방치된 믿음’으로 표현된다.
203쪽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제20조 뒤에 숨어 무속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도 이 점을 명확히 인지했으면 좋겠다. 무속을 종교로 인정할지 여부를 떠나서 무속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존중해야 할 부분과 제재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이제는 깊이 고민해야 한다. 무속을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만 우리 사회의 자정 작용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치된 믿음을 직시해야만 우리는 무속과 건강한 공존을 이어갈 수 있다.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대중 종교들과 사이비 종교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도 체제의 규범성과 정전으로 확립된 교리’를 들 수 있다. 그 안에서 누가 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도 사회 제도와의 타협점 안에 존재한다. 쉽게 말해, 성직자가 되기 위한 자격 제도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냐의 차이를 말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공인된 교파는 신학대원을 졸업한 뒤 사제고시나 목사고시를 합격한 사람에게 사제 서품이나 목사 안수를 해준다. 간혹 개신교 사이비 교단에서는 이런 게 없긴 한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제도의 공신력을 담보하려면, 이를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강력한 중앙관리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무속에는 그런 게 없다. 그러니 아무나 신내림굿 해주고, 아무나 신내림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계약서 한 장 쓰지 않는다. 공정거래법, 가맹사업법 그리고 약관법에 의해 ‘하찮은 보호’라도 받는 가맹점주와는 딛고 있는 땅의 위치가 다르다. 이쯤 하면 ‘법의 사각지대’라서 불법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이런 지적은 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그나마의 답안인 듯하다.
157쪽
우리는 애초에 진짜 무당, 가짜 무당이라는 구별 자체가 무용하다고 생각한다. 무당 스스로 자신을 기도하는 존재라 규정했듯 여기서 답을 찾아야 한다. 무당을 자신의 직업적 소명으로 여기고, 신도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기도하고, 복을 비는 행위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무속 신항은 교리가 없고 자유로워 전통 신앙으로 여겨지기보다 미신으로 치부돼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운명이 있다고 믿으며 무속에 의지하고 무당의 말에 솔깃해진다. 이에 일부 무당은 물질적, 정신적 이득을 위해 사람의 심리를 악용하여 지배하고 착취한다. 쉽게 드러나지도 않는 이런 무속 범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무속인을 직업인으로서 본다면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무속인에게도 소명 의식과 성실함, 도덕성이 요구된다.
이 외에도 무속을 하나의 종교라고 본다면, 왜 이 사이비스러운 종교에 빠지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한민의 책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박이부정博而不精이 아쉬운 한국 종교 편람'이란 리뷰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 주제에 대해 정치精緻하게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입문을 위해서는 이 만한 길라잡이도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