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어쩌다 이 꼴이 됐는지 말해주는 책들
읽은 순서에 따라 인용된 문단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케이스와 디턴이 사망률 증가를 기록한 첫 번째 인구 집단은 45~55세의 노동계급 백인 남성이다. 이 집단의 추세가 역전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사망률 증가를 추동한 요인은 케이스와 디턴이 ”절망사“라고 뭉뚱그려 언급하는 원인들의 결합이다. 절망사는 자살,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으로 인한 죽음이다. 모두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유강은 옮김, 생각의힘, 2025년, 98쪽.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 Deaths of Despair’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최근 놀라운 발견을 해낸 프린스턴대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이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현대 의학이 질병을 몰아붙이면서 기대 수명은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2014년에서 2017년 사이 그것은 증가세를 멈추더니 오히려 줄어들었다. 10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3년 연속 내림세를 보였다.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310쪽.
2017년에 새로운 표현 하나가 사회학 사전에 등재되었다. ‘절망사 Deaths of depair’라는 문구였다. 앤 케이스 Anne Case와 앵거스 디턴 Angus Deaton이 널리 퍼뜨린 이 용어는 약물 과다 복용, 자살, 음주 관련 질병 등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킨다. 학술 논문과 2020년에 출간된 책에서 두 사람은 학력이 낮은 중년 백인들 사이에 늘어난 절망사를 잘 보여 주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불황이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붕괴(특히 가정생활 속 붕괴)와 결합해 ‘누적된 불리함’이라는 패턴을 만들었다고, 또는 더 노골적으로 ‘백인 노동자계급의 붕괴’라는 패턴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녀라는 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남성 절망사는 여성 절망사의 세 배나 된다.
- 리처드 리브스,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권기대 옮김, 서울: 민음사, 2025, 112쪽.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놀라운 연구 결과를 하나 소개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국민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앞장서 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인이 인생의 절정기인 45~54세에 조기 사망하는 비율이 예기치 않게 증가하고 있다. 주요 원인은 약물 과다복용, 자살, 알코올성 질환으로, 1999년부터 2017년까지 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집단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블루칼라 백인 남성이었다.
- 앨리 러셀 혹실드, 『도둑맞은 자부심』, 이종민 옮김, 서울: 어크로스, 2025, 225쪽
이들 네 권의 책은 각각 "어쩌다가 지금의 미국은 이렇게 끔찍한 상태로 타락하고 말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누구 하나 빠짐없이 절망사 deaths of despair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인용 문단만 살펴봐도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의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그래도 그 접점이 되는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다뤘는지는 다시 요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We thought we must have hit a wrong key.
- Anne Case, Angus Deaton, Deaths of Despair and the Future of Capitalism, Prince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0. p.2.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 부부가 함께 쓴 책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가 출간된 이후, 이 책이 미국 학계에 미친 영향은 자못 큰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읽은 책들 이외에도 꽤나 많은 저작들에서 이 책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 드려다 볼 수 있는 미국의 현실이 꽤나 기괴한 꼴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두 경제학자는 책의 서론 introduction에서 “우리가 뭘 잘못 건드린 게 아닌가 싶었다”란 말을 띄울 정도였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대체로 평균신장이나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 사회는 그와 같이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다는 지표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더니, 마침내 절망사라 부를 만한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대학 학위 소지 여부로 그어지는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특히나 경제학자들답게 세계화의 파고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천착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미국 사회 전체에 전이된 암세포”처럼 미국인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의료 보험 시스템을 해부합니다.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오래전 미국인들이 실수로 삼켰다가 거대하게 성장해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를 빨아들이고 있는 워런 버핏이 말한 ‘촌충’ 같은 경제의 기생충에 불과하다. 아니라면 우리가 보기엔 그것은 국지적 의료 시스템에 국한됐다가 경제 전반에 전이된 암이다.
- 앤 케이스, 앵거스 디턴,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이진원 옮김, 한국경제신문, 2021, 312쪽
피터 터친이 자신의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권력은 한정적인데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의자 빼앗기’ 게임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대중은 궁핍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이 반엘리트가 되어 궁핍화된 대중과 연대해 사회 변혁을 추동하게 된다는 거죠.
따라서 현재 미국 사회는 백 년 전에 경험했던 ‘도금의 시대’를 지나 이루어졌던 ‘대압착’의 시대의 혁명적 변화처럼, 무언가 변화가 추동되고 있다고 봤습니다. 다만 그것이 트럼프로 대변되는 극우포퓰리즘의 형태로 응집되는 중이란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본 것이죠.
피터 터친은 트럼프의 성공 이유를 ⓐ1992년에 비해 심화된 대중의 궁핍화를 트럼프가 잘 활용했고, ⓑ상당수 정치인들이 정치 갬페인의 행동 규칙을 내팽개쳤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위기 전 시대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이데올로기적 풍경의 파편화와 국가 제도에 대한 일상적 수용의 밑바탕을 이루는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적 합의의 와해"라고도 지적했는데요.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이 그들의 책에서 정리했던 것과 같이, 세계화로 인한 저학력 노동자들의 궁핍화가 트럼프 등 극우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를 추동하게 되면서 지금의 사태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미래의 역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미국을 내전으로 밀어붙이는 두 개의 힘-궁핍화와 엘리트 과잉생산-이 2022년 현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유강은 옮김, 생각의힘, 2025년, 47쪽
미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점으로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물론이고 피터 터친 역시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를 꼽고 있는데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 바로 마이클 샌델의 이 책입니다. 공교롭게도 앞의 두 책은 마이클 샌델을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케이스와 디턴은 학력이 미국 사회의 단층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해 냈고, 터친은 그 단층선 위쪽의 고학력자들이 엘리트 내의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대중을 이용하고 있다고 봤다면, 샌델은 고학력자들이 그 단층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부도덕할 수 있는지를 폭로합니다. 미국의 대입 입시 부정을 시작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학력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드러냅니다.
입시 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점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누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느냐에 의해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나머지의 몫을 빼앗아감에 따라, 명문대에 들어갈 경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더 커졌다. 50년 전, 대학 입학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미국인은 다섯 명 가운데 한 명도 되지 않았고, 진학자들도 대체로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선호했다. 오늘날에 비하면 대학 서열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서울: 와이즈베리, 2020, 34쪽.
샌델은 입시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학력이라는 사회 자본을 획득하려는 이유를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찾습니다. 능력주의 윤리가 “승자들은 오만 hubris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 humiliation and resentment로 몰아간다”고 설명하면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해석에 ‘잘못된 영향 corrosive effect’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즉,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여기게끔” 하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고 부연합니다.
The relentless emphasis on creating a fair meritocracy, in which social positions reflect effort and talent, has a corrosive effect on the way we interpret our success (or the lack of it). The notion that the system rewards talent and hard work encourages the winners to consider their success their own doing, a measure of their virtue—and to look down upon those less fortunate than themselves.
- Michael J. Sandel,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Farrar, Straus and Giroux, 2020, p.28.
그리하여 샌델의 논의는 케이스와 디턴의 주장과 맞닿게 됩니다.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고도 지적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경제적 어려움에 그치지 않고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자각으로 더욱 증폭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샌덜은 앨리 러셀 혹실드의 책, 『Strangers in Their Own Land: Anger and Mourning on the American Right』를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경제적 진보는 그들의 살림을 더 어렵게 했으며 소수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 머신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작동이 멈춰버렸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분노했다.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서울: 와이즈베리, 2020, 317쪽.
블루칼라 남성은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자살 같은 “절망의 질병”에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드러났고 애팔래치아 지역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재앙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 앨리 러셀 혹실드, 『도둑맞은 자부심』, 이종민 옮김, 서울: 어크로스, 2025. 23쪽.
바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혹실드는 “1970년대 이후 붉은 주(공화당 지지층이 많은 주)들은 세계화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기업의 국외 이전, 자동화, 노동조합의 쇠퇴로 인해 붉은 주들은 파란 주(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주)들보다 더 가난하고 건강 상태도 더 나빠지면서 교육 예산 부족, 사고에 대한 취약성 증가, 기대 수명 감소 등의 문제에 부딪혔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니 케이스와 디턴의 연구에서도 드러나듯이 애팔래치아 지역의 절망사 비율이 높은 이유가 설명된다고 봅니다. 특히나 이곳은 “한때 석탄과 석유를 채굴하던 지역은 국가의 핵심 자산으로 찬사를 받으며 자부심 경제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지만 나중에는 오염된 하천과 깎여나간 산들이 있는 곳으로 인식되며 자부심 경제에서 낮은 위치로 전락했다”는 점도 부각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부심’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앞서 케이스와 디턴에 이어, 터친과 샌덜의 책에서도 언급되었던 ‘일에 대한 자긍심’을 혹실드 역시 주목합니다. 애팔래치아 지역의 전직 광부들은 “자신의 숙련된 능력과 지식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죠. “광업에 특화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지식”일뿐이며, “자신의 지식과 일을 인정해주던 공동체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다는 겁니다.
자부심을 상실하게 되면 수치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수치심에 맞서는 방법이 수치심이 따라붙는 대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한정되고 맙니다. 이때 트럼프는 그 수단을 제공합니다. '잃어버린 것‘이 '도둑맞은 것‘으로 바뀌면서 수치심도 차츰 비난으로 바뀌고, 그럴 때마다 슬픔은 분노로, 우울감은 격분으로 변했습니다. 오피오이드가 몸의 고통을 지워주는 대신 미국인들을 절망사로 이끌었다면,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은 '도둑맞은 자부심‘을 채워주는 대신 미국 민주주의를 절망사로 이끌었다고 봅니다.
이 책을 왜 지금 펴내는 걸까? 여섯 가지 큼직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내 생각보다 상황이 더 나빠서다. 교실과 캠퍼스에서 고군분투하는 소년들, 노동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 가는 남자들, 자녀들과 연락이 끊기는 아버지들에 관한 헤드라인을 나는 더러 알고 있었다. 그중 얼마쯤은 과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태는 더 암울했다.
두 번째, 특히 계급과 인종 같은 또 다른 불평등의 끝에 내몰린 소년과 남자들이 가장 아등바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소년과 남자들은 경제적·사회적 사다리의 저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 대다수 남자는 엘리트 축에 끼지 못하며, 그런 자리를 차지할 운명의 소년은 더욱더 적다.
세 번째, 소년과 남자들 문제의 본질은 개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라는 사실이, 그런데도 그런 관점에서 다루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정부가 벌이는 사업들을 위시해 여러 사회정책이 소년과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섹스와 젠더의 문제에 관한 정치적 교착 상태 때문이다. 양측은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 이념의 입장으로 파고들었다. 진보파는 중요한 성 불평등이 양방향으로 달릴 수 있음을 발아들이지 않고, 남성 문제를 재빨리 ‘유해한 남성성 toxic masculinity’의 증상으로 치부한다. 보수파는 소년과 남자들의 어려움에 더 민감해 보이지만, 시간을 되돌려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회복하기 위한 명분으로만 사용한다. 여섯 번째, 나는 정책을 연구하는 전문가 wonk로서, 이 문제들을 그저 애통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긍정적 아이디어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 리처드 리브스,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 권기대 옮김, 서울: 민음사, 2025, 17쪽~20쪽.
리처드 리브스는 “전반적으로 남성 절망사는 여성 절망사의 세 배나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남자’들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세계화에 따른 불평등 문제에서 예전과 달리 ‘대졸 학력’이 없는 남성들의 문제가 전에 없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