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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대드 Jul 16. 2024

갑작스러운 아빠의 실업 고백

[아들과 나]

천하무적이 되었다. 

天下 無籍. 하늘 아래 적을 둘 곳이 없다. 

23년 만에 처음으로 가정 외의 적(籍)이 사라졌다. 

고정적인 수입이 사라지고, 밥벌이를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20년 가까운 대기업의 안정적 생활을 뒤로하고 스타트업이라는 불안정 하지만 도전적 시장에 마주하고자 하는 나의 선택의 끝은 내 기대와 달랐다. 회사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사업부문 리더들과 함께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긴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려왔으니, 숨 고르기가 필요한 시기라고 위로와 응원을 해주었다. working+dad로서 회사와 가정의 밸런스를 잘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으니, 한 축이 무너지고 난 후 균형이 무너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직장을 잃고 난 후,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아들에게 어떻게 얘기하지'였다. 

당장 집에 있는 아빠를 아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코로나시기에 아빠의 재택근무를 3년 가까이 경험했으니, 재택근무 중이라고 얘기할까도 생각했다. 

아니면 아들의 등교시간에 맞춰 집 근처 도서관으로 출근부를 찍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은 그렇다 쳐도 월급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계에 불안은 당연히 나의 행동에도 변화를 만들 테니 말이다. 





회사와의 계약관계가 종료된 뒤 어느날 아들은 일과대로 질문한다. 

'나 학교 갔다 오면 집에 있어?'

아내가 아닌 내가 대답을 가로챈다. 

'응 아빠가 있어. 앞으로 아빠가 있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아'

'오. 진짜? 좋다. ㅎㅎㅎ'

아들의 질문은 거기서 끝. 학교 갔다 돌아온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 있길 바랐구나 싶어 괜히 짠한 마음이 든다. 

자연스레 하교한 아들과의 시간이 늘어났다. 

하교와 등원 사이 시간 동안 캐치볼을 하거나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간다. 

함께 놀고 책을 읽으며 함께 있는 시간의 의미를 키우는데 집중했다. 아빠의 실직이 아들의 불안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와 있는 시간이 마냥 좋으니 아들의 순수함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도 나의 일상에 대해 질문한다. 회사 생활은 어땠는지, 아빠가 하는 서비스 일정을 묻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얘기하면 될 텐데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직장을 쉰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여느 때와 같이 아들은 하교했고, 난 부엌에서 아들에게 줄 간식을 만들고 있었다. 요리 냄새에 가방을 던지며 아들이 던진 돌직구. 

'아빠 오늘도 있었어? 근데 요즘 회사 안 가?'


'응. 아빠 오랫동안 일해서 잠깐 쉬고 새로운 회사 찾아보려고...'

'아빠 회사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잖아.'

18년간 같은 회사를 다닌 아빠만 보다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만도 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어. 잘 준비해 봐야지.'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 툭 하니 말을 건넨다. 

'아빠 다음번에는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로 가. 회사 바꾸면 아빠도 힘들잖아.'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닐 텐데 위로하는 11살 아들의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명치끝이 먹먹하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바람에 아들을 꼭 껴안는다. 

어느덧 사내냄새나는 아들의 정수리가 코끝에 와닿는다. 

녀석, 짐짓 어느새 길어진 팔로 나의 허리를 깊게 감싸 안는다. 


문득 이런 기억이 떠올랐다 


등교할 때 안방을 슬쩍 보면 안방 문틈으로 얼핏 보이는 아빠의 뒷모습. 

구겨진 종이가 잔뜩 쌓인 쓰레기통. 

새벽녘 고민과 함께 했을 남겨진 크라운 맥주 반 병. 

하교했을 때 서둘러 길을 나서는 아빠의 발걸음과 표정들. 

의미를 모른 채 스쳐지나갔던 장면들이 자연스러운 기시감으로 찾아든다. 


어떻게 말할지 낑낑거린 시간에 비하면 나의 실업 고백은 싱겁게 마무리되었지만, 


아들은 나를 그때 그 시절의 아빠에게로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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