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니 Aug 15. 2019

일 년 전과 똑같은 결심을 해본다

가을바람에 조금 선선해진 마음 


180906


이렇게 회의가 긴 회사는 처음이다. 잦고 길다. 

회의를 준비하고, 회의하고, 다시 회의 준비하고 또 회의하고, 무한 반복이다 요즘은. 회사가 바쁜 시기인 것 같다. 회사의 전체 회의 말미에, 다음 주에 오는 새 직원은 당분간 일을 알려주기보다 일단 바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일(다시 말해 잡다한 일)들을 시키자는 말이 나왔다. 지금은 우리 모두 바쁘니까, 라는 이유였다. 목이 타서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제가 알려드릴게요."'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뭘 하는지 알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다행히 뒷말은 삼켰지만, 가만히 있기로 해놓고 또 나댔다. 뭘 하는지 잘 모르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답답한 게 없다. 그런 시간을 보냈고, 여전히 보내고 있는 내 입장을 떠올리며 말이 먼저 나갔다. 오지랖이 하늘로 뻐렁친다. 신입 직원 주제에 신입 직원을 커버하겠다고 했으니. 이러니 사람들이 나이 많은 신입을 불편해하는 걸까 하고 잠깐 혼자 생각해봤다.




180907


아침 출근길부터 이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금요일, 그리고 바야흐로 가을이 도래했다. 주말에 딱히 할 건 없지만 주말이 좋고. 가을이라 딱히 할 건 없지만 가을이 좋다. 퇴근 후 딱히 할 건 없지만 그래도 퇴근이 좋듯이.  


딱 작년 이맘때,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은 다소 복잡했지만 몸은 여유로워 가을을 제대로 누렸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일 년이 지나 벌써 또 가을이 왔다. 분명한 건 작년의 가을도 좋았지만 올해의 가을도 또 좋을 거라는 것. 뭐든, 누리는 사람의 몫이다. 퇴근도, 주말도, 가을도, 맘 껏 누릴 테다.


한결 선선해진 날씨, 여전히 한 낮엔 기분 좋은 햇살이다




180912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대표와 면담을 하다가 못 참고 또 말해버렸다. 내내 너무 답답했었다. 


"저도 다른 직원들이랑은 괜찮은데 N이랑 소통이 잘 안돼요." 대표가 콕 집어 말한다. 나랑만 소통이 안된다고. '그렇구나, 우린 정말 안 맞는구나.' 다시 한번 확인 사살. 근데 이 사실을 확인했대도 뭐 별 수 있는 건 없다. 누군가 참고 맞추는 수밖에.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참고 맞추는 수밖에. 대표가 직원의 소통 방식에 맞춰 줄 수는... 없다, 아마도. 


대표가 말을 이어갔다. 누구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고. 그래,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나도 대표를 탓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일이 잘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대표는 듣는 사람(본인)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내 태도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핑계 대려는 걸로 느껴진다고 했다. 정말 슬펐다. 


점심시간에 걷던 산책 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대화가 대강 마무리되었다. 점심 생각이 싹 달아나 회사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휙휙 여기저기를 걸었다. 그리고 들어와 다시 일을 했다. 퇴근 시간쯤 되니 너무 배가 고프기도 하고, 오늘의 감정을 집에 그대로 가고 싶어서 뒷자리에 앉는 동료 R에게 밥을 먹고 가자고 졸랐다. 


R은 성격이 겁나 쿨하다. 말투는 뚝뚝한데 나는 뭔가 그 말투가 살갑다. 오늘은 그 쿨함에 기대어 볼까. 밥 먹으면서 은근-히 마음속 불편함(대표나 회사 험담)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R이 먼저 선수를 친다. 회사 처음 와서 어려운 점도 많이 있었지만, 좋은 것도 참 많았다고. 그리고는 예의 그 쿨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려운 거 보지 말고 좋은 거 보고 다니는 거죠."  


나보다 반년 앞서 입사한 선배님의 말이다. 그러게. 어려운 게 왜 없겠어, 더구나 회산데.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내게 필요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180913

 

어제 대표와 그렇게 불편하게 면담을 마무리하고 난 뒤, 오늘 아침 바로 또 회의를 잡았다. 것도 대표와 나, 단 둘이. 대표가 회의실에 들어와 앉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마음이 조금 짠했다. 요새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다는 걸 안다. 나도 사무실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니, 그쯤은 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먼저 말을 걸었다. 


오후에 아주 중요한 외부 미팅이 있었다. 내 사수 격인 동료 C가 내가 제작한 신제품 관련 콘텐츠를 가지고 미팅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어제 퇴근 전에 갑자기, 미팅에 함께 들어가자고 제안해서 나도 미팅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수가 진행하는 미팅이고 상황상 그게 맞는 거겠지만, 내가 만든 자료인데 회의 내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실에 나 혼자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까지 투명 인간을 만드냐.' 투덜대며 퇴근했다. 


퇴근 후에도 자꾸자꾸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무엇이 또 날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대체 나는 왜 자꾸 불편해지는가, 왜 조급해지는가. 


아마도, 한 마디도 의미 있는 말을 건네지 못한 것 같아서였나 보다.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서른여섯 해 동안의 시간이 꽤나 나를 증명받기 위한 노력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게 치열한 시간을 보낸 뒤, 퇴사를 하고 별안간 뚝 떨어져 혼자 서 있는 시간을 길게 보냈다. 그리고 또 입사, 혼자 걷던 길에서 나와 다시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걷게 되었다. 아무도 재촉한 적 없는데, 조금이나마 틀었던 방향이 익숙하게 원상 복구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다시금 부지런히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증명받아야 해. 경쟁이야. 잘해야 해, 누구보다 더. 맙소사. 


다만 희망적인 것은, 분명히 더 이상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지금의 상태가 불편하다. 사실은 익숙하지만, 다시 또 익숙해지려는 내가 불편한 거다. 

증명받으려고 애쓰지 말자. 그것보다 중요한 게 너무 많다. 


블로그를 뒤적이다가 작년에 써 놓은 기록을 보게 되었다. 

17년 8월 29일, 한수희 작가님의 북 토크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써놓은 기록이었다. 


[ 증명받으려 애쓰지 말자, 일상의 A 컷 만을 만들려 애쓰지 말자. 그럼에도 자책하지 말고 생긴 대로 살자.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생긴 것을. 나는 걍 씩씩하게 살 거다. ]


뭐야 일 년 전에도 알았다는 거 아냐, 그동안 내가 기를 쓰고 증명받으려 하며 살았다는 것을. 결국 생긴 대로 살자, 오늘과 똑같은 결론을 냈었다는 거잖아. 근데 왜 또 발전한 게 없냐 한심해하려다가. 깨닫고 알게 된 것대로,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처절히 감수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 일 년을 또 빙빙 돌았지만, 지금이라도 또 깨달은 대로 살아내려 노력할 수 있다면 괜찮을 거다.  


괜찮다 괜찮아. 그리고, 일 년 뒤에 다시 이 기록을 읽어보자.


퇴근 후 카페, 두 집 건너 한 집이 카페인 동네에 회사가 있는 즐거움





이전 09화 다정한, 두 번째 급여 명세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