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NO를 못할까?

예스맨이 되느니 차라리 노맨이 되겠습니다...


*현실에서 많은 부분 각색하였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공공기관에서의 세월을 겪어낸 내가 정리해 본 바, 공공기관의 일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되겠지만 하기 싫은/어려운 일

2.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되고 하고 싶은 일

3.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안 되고 하기 싫은/어려운 일

4.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개뿔 하나도 안 되고 하면 큰일 나는 일


먼저 1번.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되겠지만 하기 싫은/어려운 일. 대부분의 일이 1번에 속한다. 아 하면야 좋겠지. 해서 안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기 싫거나(일명 짜친다거나) 매우 어려운 일이 많다. 홍보를 강화하기 위해 매달 보도자료를 배포하자거나, 사업 관련 의견청취를 위해 간담회를 개최하자거나..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성과를 위한 아이디어이지만, 품이 많이 들고 실무자는 고생하는 그런 일들이다. 입은 부루퉁해지지만 어쨌든 회사/팀의 성과를 위한 거니까 하긴 한다. 일할 때는 아이고 짜친다 아이고 짜증 난다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해놓고 나면 뿌듯하다. 연말에 성과를 짜내서 써내야 할 때도 써먹기 좋다. 이런 일은 적당히 하긴 해야 한다.


두 번째.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되고 하고 싶은 일. 가뭄에 콩 나듯 있긴 있다. 내가 처음부터 기획해서 보고했는데 추진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지거나, 위에서 지시한 내용인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업무이거나. 내 경우에는 뭔가 자료를 보고 분석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업무를 좋아하는데, 아주 간혹 이런 일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정말 성심성의껏,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보려고 하는 편이다(그래야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세 번째로,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안 되고 하기 싫은/어려운 일이 있다. 이런 일의 발생 빈도는 1번보다는 적고 2번보다는 많다. 이미 다 결정되어서 할 수밖에 없는 일 재검토하기, 다 만든 보고서 양식만 바꿔서 다시 만들기 등... 이걸 왜 하지? 정말 바보 같다 싶은 일이지만 업무가 꼬이다 보면 이런 바보 같은 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런 카테고리의 일은 표정이 썩어가면서도 하긴 한다. 거지 같지만 누군가는 해치워버려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 글은 마지막 네 번째 카테고리의 일에 대해 쓰려고 시작했다. 팀/회사 성과에 도움이 개뿔 하나도 안 되는데 하면 큰일 나는 일. 언뜻 봐서는 대체 이런 일이 뭐가 있을까 싶은데, 의외로 가끔 생겨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윗분들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실무자에게 추진하라고 지시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중에 100% 감사에서 지적받을 만한 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일을 지시받은 실무자는 이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이거.. 분명히.. 한 2년 뒤쯤에 우리 부서 감사하면 지적받는 정도로 안 끝나고 최소 징계인데..' 당연히 이런 생각을 위에 보고한다. 하지만 윗선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다 책임질게'라며 일을 진행하라고 한다. 이럴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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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Florian Schmetz



제목에서 이미 스포 해버렸다. 나는 1번, 2번, 3번의 경우에는 짜증은 날지언정 'YES'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4번의 경우에는 이제 'NO'를 외친다. 공공기관 n년 다닌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공공기관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것만큼 미련하고 피곤해지는 일은 없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쓴 적이 있는 것처럼, 공공기관에서 하는 일은 몇 년이 지나면 반드시(!) 감사를 받는다. 그리고 감사에서 지적받는 일을 하는 것만큼 화가 나는 것도 없다(일을 해서 힘들고+감사지적받아서 힘들고 이중고니까). '내가 책임질 테니 진행해'라고 말한 상사는 몇 년 후에는 99.99%의 확률로 다른 부서로 이동해 있고(순환근무의 폐해) 책임져주지 않는다. 고로 윗분의 기분은 크게 상하고 내 평가는 박살 나겠지만, 이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임을 솔직히 밝히고 안 한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에 다니는 한.. 80%?의 사람들은 4번의 경우에도 'YES!'를 외친다. 흔쾌히 외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한다. 이유는? 윗분이 시키니까. 상명하복의 문화 그 자체인 공공기관에서 부서장이 시키는 업무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어쩔 때는 말도 안 되고 위험한 업무인 걸 알면서도 윗분의 '가오(품위? 같은 것을 의미하는 속어)'를 지켜주기 위해서 해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YES맨이 넘쳐나는 공공기관에서 NO를 외치는 사람은 일명 '또라이'가 되어 윗사람들에게 찍힌다. 상사들은 NO를 말한 사람에게 중요한 업무를 주지 않고, 평가를 최하위로 깔아서 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나도 안다. 80%의 사람들이 YES맨이 되는 이유를.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좀 순종적이고 착해서(좋은 의미의 말 아님)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모두가 NO를 외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시킨 사람이 내 승진과 성과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평가자이기 때문이다. 나도 수년간의 공공기관 생활을 하면서, 부서장의 말을 거슬렀을 때 내가 실제 했던 업무의 성과와 관련 없이 내 평가가 어떻게 조져질 수 있는지를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아닌 것에 YES를 외칠 수 없는 성격의 사람도 있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그게 나일뿐(제길). YES맨이 되어야 빨리 승진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평판도 좋아지는 거, 다 알겠다. 하지만 난 안 된다. YES맨이 되느니 NO맨이 되겠다. 그렇게 공공기관에서의 내 삶은 점점 삐딱선을 타게 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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