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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기엔 너무 달콤한 것들

그렇지만 결국엔 포기한 것들


퇴사를 결심하기에 앞서, 내가 회사를 나가게 되면(그리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다. 사실 생각할수록 이성이 나가면 안 된다고 붙잡긴 했지만(...), 어쨌든 이미 나간 상태에서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안정적인 월급

말해 뭐 해. 이것만큼 아쉬운 게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21일만 되면 n백만 원이 통장으로 입금된다니?(물론 월급 받는 대가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회사가 알아서 날 괴롭히긴 했다) 어쨌든 월급이란 정말 소중한 것. 다녔던 회사의 연봉이 낮은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는 하고 싶고 사고 싶은 게 참 많은 편인데, 그걸 하고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러면 월급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의 굴레에 지난 몇 년간 빠져 있었던 것 같다.


2. 훌륭한(?) 신용

공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은행에서는 내가 당연히 정년까지 다닐 줄 안다. 정년까지 안정적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사람에게 은행은 높은 신용점수를 하사한다. 퇴사하고 자유인(?)이 된다면 나의 신용도는 바닥까지 떨어질 예정이었다. 돈을 언제 어떻게 버는지 모를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신용카드 만들기도 전보다 어려워질 테고, 마이너스 통장도 뚫기 쉽지 않겠지.. 이런 공포가 나를 흔들리게 했다.


3. 사회적 안정성(주변의 평가)

"어떤 일 하세요?"라는 물음에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공기업 다녀요"라고 대답하면 모두가 "우와!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라고 칭찬의 한 마디를 남기고 대화가 종료되었다. 공공기관 다니는 사람. 그 한 마디로 나의 이미지는 바로 설정되었으며, 그 이미지는 꽤 좋은 것이었을 테다.


4. 4대 보험, 퇴직금, 복지

회사가 내주는 절반의 4대 보험비, 다니기만 하면 연차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 퇴직금, 그리고 회사 연계 복지몰에서 쓸 수 있는 (사실상 돈이나 다름없는) 복지포인트까지. 그 모든 자잘한 혜택들이 퇴사하면 사라지게 되었다. 4대 보험이나 퇴직금은 당장 와닿지 않는 것이라 오히려 괜찮았지만, 복지포인트가 맘에 걸렸다. 최근 몇 년간 큰돈이 들어가는 가전을 살 때 복지포인트를 투여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사 왔기에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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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Van Tay Media



5. 타이틀, 명함

어디 가서 그래도 당당히(?) 내밀 수 있는 명함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미디어 계열의 공공기관이었기에, 미디어 업계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회사였다. 그러니 무슨 행사를 가든지 명함을 내밀면 내 신분이 바로 보장되었다. 정부와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가치 있는 명함이었을 것이다.


6. 소속감

내가 큰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계속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했으니 그다음엔 바로 회사에 소속된 셈이다. 기쁜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소식을 알릴 단체가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안정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회사를 나오면 오직 나로서 우뚝 서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무섭고 쓸쓸했다.



이렇듯 대충 생각해도 엄청나게 다양한 장점이 있는 회사생활. 나는 왜 나오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음에도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위에서도 몇 번이고 등장했지만, 공기업에 다닐 때 가장 큰 장점은 '안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건 맞다. 일과시간에 일하고, 퇴근하면 놀고. 한 달에 한 번씩 만족스러운 월급을 받고. 하지만 나는 그만큼 안정적으로 불행하다고 느꼈다. 하루에 최소 8시간씩 일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한 번쯤은 이 모든 것이 없고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퇴사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 덧. 가정에 좀 큰일이 생겨서 지난주 공지도 없이 연재를 쉬었습니다. 제 글을 기다려주셨을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이번 주부터 다시 힘내서 연재해 나가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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