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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Sep 20. 2018

사람을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쉽게 질투에 사로잡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나는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주구장창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그 기다림에 익숙해졌다. 겨우 며칠 만에. 


 그래도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어야 좀 나은 것 같았다. 집에 있으면 덥고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금방 몇 주만 지나면 다시 이런저런 일들을 데드라인에 맞추어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삶으로 진입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번 학기까지만 다니고 휴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쉼으로 가득한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삶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대단한 커리어를 쌓고 싶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즘은 갈수록 더했다. 예전엔 그래도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일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요즘은 그런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즐기며 살고 싶었다. 그 적당히라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정도 살았으면 그 적당히 정도는 누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그러니까, 적당히 사는 게 목표니까 적당히 열심히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요즘의 나는 하고 있었다.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의외로 이유를 알 수 없게 요즘은 불안이 없었다. 그냥 어떻게든 잘 풀려 나가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보기 때문인 걸까. 다른 이들의 인생이 잘 풀려 나간다 해서, 내 인생이 비슷하게 잘 풀려 나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적당한 믿음을 늘 품고 있어서,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요즘은 글쎄, 잘 모르겠다. 대신에 좋은 이야기를 품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 만나든 좋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 그 좋은 이야기라는 것은 어떤 자리,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장소와 사람을 불문하고 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꺼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전엔 일을 잘하고 싶었다면, 나는 이제 일을 잘하는 동시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일을 잘하는 건 어쩌면 디폴트 같았다. 그래도 나는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았고, 내 할 일은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련된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인 걸까. 


 그냥 온종일 드러누워 있어도 시간이 간다는 게 신기했다. 내 자신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하고 있고, 바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있고,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야,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간들도 있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도 딱히 들지 않았다. 쉬는 게 뭐가 어때. 온종일 누워서 드라마를 보고 영상을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다 졸리면 자는 삶을 살고 싶었다. 누군가 그런 나를 한심하게 보겠지, 하는 강박 따위 없이 온전히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딱히 멀리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물론 여행이 좋았고, 여행에서 느끼는 새로운 것들이 좋았지만 그렇다 해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롯한 쉼이었다. 오롯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면, 굳이 먼 곳이 아니더라도 굳이 아름다운 곳이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내 몸을 뉘일 수 있고, 그 어떤 시선에서든 자유로운 곳이면 족했다. 그러니까 굳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방이 필요하지 않았고, 굳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일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음식이 맛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반대로 극한의 상황을 자랑하는 오지일 필요도 없었다. 


 무엇인가 즐길 게 많은 곳보다는 즐길 게 없는 곳이 더 어울리는지도 몰랐다. 아직도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행복했던 기억은 캄보디아에서의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 대단한 것 하나 없었던 그 학교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여전히 그때 아이들의 웃음을 잊을 수 없고, 나에게 달려와 안기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사람이 있고 웃음이 있던 곳. 무엇인가 없을 때, 우리는 서로를 더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는 사랑과 믿음 대신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는 오롯하게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마음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사고 배우고 해야 하는 것일까. 굳이 무엇인가를 사지 않아도, 마음만으로도 통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무엇인가 없었기에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없었고, 무엇인가를 더 주고 싶다는 생각 없이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은 없었으니, 그저 마음을 다하고 싶었다는 말과 동일하기도 하다. 


마음을 다한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어쩌면 겨울에 다시금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벌이는 것 대신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듯한 요즘이었다.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고 무엇인가를 갈고 닦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방학을 너무나 바쁘게 보내서 그런가 싶기도 했고 너무 더워서 나가 떨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 방학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 채웠다. 변함없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 사람들과 가벼운 말들과 진지한 말들을 넘나들며 나누는 시간을 채웠다. 또 못 본 지 어느 정도 되었다고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다. 


내 삶의 낙은 결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자주 들었는데, 늘 어떤 일을 하든 내리는 결론이 그거였다. 음악 공연이 없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고, 영상이 없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나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버텨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순간들에 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 수 있었다. 버텨야 하는 순간들 말고도 나는 사람들이 없으면 인생이 지루해서 살지 못할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고 했지만, 혼자인 시간을 잘 견디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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