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록지 않은 셰어하우스 생활
엄마의 말을 다 듣지는 않는다. 30대 중반의 반짝 독립도 마찬가지로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갔었다. 엄마는 내가 낼 독립 비용, 월세를 특히 아까워하셨다.
아빠가 아프셨을 때 다시 본가로 돌아와 병원에서의 아빠 간호를 가족들과 번갈아가며 함께 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가 지났을까 나와 가족들이 마음을 추슬렀을 때 나는 다시 독립에 대한 욕구가 솟아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환경을 바꾸고 뭔가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 때문에 다시 독립을 꿈꾸지 않았나 싶다.
본가는 내가 유치원 때부터 살던 집이다. 엄마는 시집와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집이다. 그만큼 오래된 주택으로 집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여름에는 무척 더웠고,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
무엇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혼자 살기는 싫었다. 돈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다시 셰어하우스를 구해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라는 곳을 발견했고, 절차를 거쳐 조합의 달팽이집 중 들어갈 수 있는 집을 보러 갔고, 거기서 한 방을 만났다. 보증금도 몇백만 원 정도로 적은 편이고, 월세도 20만 원대로 저렴했기에 고민 없이 선택했다.
30대 초반 친구와 함께 했던 인천 검암동 셰어하우스 생활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서울 셰어하우스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각자의 방이 있지만 거실과 주방, 화장실은 공유하는 셰어하우스로 낯선 하우스 메이트들과 맞춰가는 기간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했다.
살면서 하우스 메이트들과 잘 맞을 때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내적 갈등이 많았다. 공용 공간을 함께 청소하면서 서로 달랐던 청결의 기준을 확인했고, 하우스 메이트의 청결 기준이 내 생각보다 높아서 맞추기가 조금 힘들었다. 가족이 아닌 남과 사는 것의 어려움을 여지없이 경험했다.
나는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방을 빼기로 했다. 30대 중반에 약 1년 반 정도의 서울 셰어하우스 생활을 마치고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만 39세인 지금까지 본가에서 살고 있다.
이삿날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내가 그동안 한 것이 독립이 아니라 가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은 이사를 마치고 본가 내 방에서 에어컨을 켠 채 엄마, 동생과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