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가을
우리 부부는 제주도를 원래부터 참 좋아했었다. 신혼여행은 몰디브로 갔으면서 몇 달 뒤 그 해 여름휴가는 제주도로 갈 만큼. 1년에 세네 번 갈 때도 많았고, 태교여행으로 괌도 가고 제주도도 또 갈 만큼. 그렇게 우리는 "나중에 제주도에서 꼭 한번 살아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일 년 살기를 갈 줄은 나 자신도 몰랐었다. 2023년 5월 나는 언론사 기자에서 대기업 홍보팀장으로 이직 제의를 받고 회사를 옮겼다. 평생 해온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솔직히 힘들긴 했었다. 한 석 달 동안은. 그 기간 동안 남편도 회사 일과 건강상의 문제로 힘들어했었다. 그러다가 가끔 지나가는 소리로 '둘 다 퇴사하고 제주도나 갈까' 했지만, 그냥 하는 소리로 들렸다. '퇴사하고 제주도나 갈까'는 지난 우리 결혼 생활 내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줬다. 석 달이 지나자 새 회사 생활도 '이 정도면 다닐 만 해졌다' 수준에 올랐으니까.
그러다 주말을 껴서 제주도에 놀러 갈 일이 생겼다. 아들의 유치원 친구가 제주도로 이주했는데, 1년이 넘게 이사 간 친구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친구와 만나게 해주려 한 것이었다. 남편은 이번에 제주 내려가서 집을 한번 알아볼까, 하고 제의했다. 예전부터 우리는 제주도에 세컨드 하우스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놀러 갈 때마다 '부동산을 통해 집을 한번 볼까' 했었는데, 이번에 정말 한번 보자고 마음먹고, 내려간 김에 집을 몇 개 둘러봤다. '이게 뭐야' 싶은 형편없는 집도 있었고, 조금 좁지만 카페처럼 멋지게 꾸며진 집도 있었다.
중개업소 사람과 여러 개의 집을 둘러본 후 남편이 물었다.
"마음에 드는 집은 없어?"
"딱히? 굳이 꼽자면 그나마 제일 마지막 집?"
그 집은 지어진 지 몇 년 안 된 2층 타운하우스로, 2층 테라스엔 수영장도 있었다. 조천읍 와산리 외진 곳에 있었지만, 그래도 함덕해수욕장이 15분 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장점이 있었다.
"... 넌 제주에 내려갈 생각은 없는 거지?"
"당장은. 나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내 일은 어떡해. 오빠는 휴직이 가능하지만 나는 다닌 지 1년도 안 돼서 휴직도 못해."
"그러면 넌 회사를 계속 다녀. 나는 1년 육아 휴직하고 그냥 집에서 쉴게."
그의 얼굴을 보자 풀 죽어 보였다. 내가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내 남편이 풀 죽은 모습은 보기가 싫었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말 쉬고 싶었나 보다 했다. 업무상 컴퓨터를 자주 봐서 눈도 아프다고 했고(원래 '아벨리노 각막이상증'이라는 유전병도 있었다), 허리 쪽이 안 좋다며 걸을 때 순간 멈췄다가 어그적 걷기도 했었다.
"그래, 같이 제주 가서 쉬자. 나 관둘게."
그렇게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봤던 집 중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마지막 집을 보증금 2000만 원에 연세 1600만 원으로 구했다. 나는 새 회사를 10월 6일까지 다녔고, 퇴사한 지 약 일주일째인 12일엔 제주도에서 일 년 살기 첫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