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인턴 시작 전, 인턴에 관한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고 홀로 여행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제 인턴 생활이 시작되는 3.1일까지 딱 일주일만을 앞둔 상황이었다. 인턴이 시작하기 일주일 전부터 우리는 이제 레지던트가 될 선배 인턴들에게 인계를 받는다. 학생 때 기본적인 술기는 다 배우지만 병원마다, 병동마다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에 관한 인계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돌게 되는 과는 소아과였다. '소아과'하면 굉장히 예민하고 신경 많이 쓰일 과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아 채혈은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인턴들은 이 어려운 소아 채혈을 한 번에 성공할 만큼 뛰어나지 않다. 한 번에 성공해도 엉엉 우는 것이 아기들인데, 인턴들이 두 번 세 번 찌른다면 아기들은 정말 많이 힘들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병원에서는 소아 채혈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 병원 최고의 꿀', '힘든 인턴들에게 신이 내려준 선물', '쉬어가는 시간'등으로 불리는 소아과지만, 이제 갓 인턴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인계받을 것이 적진 않았다.
소아과에서 인턴이 하는 일은 신생아 청력검사, 소아 심전도 등의 조금 독특한 검사와 아침 명부 만들기, 신생아 망막검사 보조, 신생아 심장 초음파 보조, 신생아 폐 계면활성제 투여 시 자세 보조 등의 각종 술기 보조 역할, 그리고 MRI 등의 의사 동반한 검사가 필요할 경우 같이 검사할 때 동행해서 아기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일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데 술기 보조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1~2번씩 밖에 안 하는 것들이어서 사실상 인턴 정규 근무시간 12시간 중 하루 평균 2~3시간씩은 쉬는 시간이 있는 정말 편한 턴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소아과에서만 하는 특수한 술기들이 많기 때문에 인계받기는 만만치 않은 턴이었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예비 인턴들에게 연약한 신생아를 상대로 검사를 하는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교수님들이 하는 술기를 보조하는 역할도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교수님에게 일 못하는 인턴으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나를 담당해준 선배는 인계를 정말 잘해주셨다. 다음 해의 인턴들에게 인계를 하는 것은 선배 인턴들의 의무이긴 하지만 이행하지 않아도 전혀 불이익이 없는 의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인턴들은 "원래 깨지면서 배우는 게 인턴이다"라면서 인계를 대충 해주고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하게도 그 후임은 인턴을 시작하자마자부터 정말 먼지 나게 털린다. 나에게 인계를 해준 선배 Y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년에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되는 Y선배는 소아과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었지만 굉장히 상세하고 친절하게 인계를 해주었다.
당직에 관한 인계도 받았다. 당직에 관한 인계는 C 선배와 J선배에게 각각 하루 씩 이틀에 걸쳐서 인계를 받았다. 첫날 C선배와의 인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내년에 이비인후과 레지던트가 되는 C 선배는 차분하고 꼼꼼하게 하나하나 잘 알려주셨다.
"관장약을 다 넣고 튜브를 뺄 때에는 꼭 휴지로 막고 빼야 돼요. 새어 나올 수가 있거든요. “
보통 환자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인계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사항들은 잘 인계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월 초에는 이런 인계를 받지 못한 인턴들이 항문을 막지 않고 튜브를 빼다가 똥물을 맞는 경우가 꽤나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C선배는 우리에게 정말 다양한 꿀팁 들을 알려주셨다.
“우리 선배들은 인계를 너무 대충 해주고 가서 우리는 정말 인턴 시작을 힘들게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후배들한테 인계를 정말 잘해주고 가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하는 선배를 보면서 예과 신입생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1, 2학년만 같은 캠퍼스를 쓰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학교 앞에 있는 투썸플레이스에 선배들이 하나도 없었다. 위치도 우리 캠퍼스랑 가장 가깝고 좋은 카페였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선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는데,
"우리 신입생 때 가는 카페마다 선배들로 꽉꽉 차 있어서 그게 너무 불편했거든 그래서 우리끼리 얘기해서 여기 카페는 가지 말기로 했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이 학번은 한결같았다. 우리가 이 분들의 바로 아래 후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인턴 시작이 상당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그 생각은 쏙 들어갔다.
J 선배는 굉장히 똑똑하고 쿨한 선배였고 인계도 잘해주셨다. 다만 본인이 똑똑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럴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때 터졌다. J선배에게 혈액 배양 검사에 관한 인계를 받던 중이었다.
“소독약으로 세 번씩 소독하고 뽑으시면 돼요. 학생 때 술기 준비하면서 많이 해봤죠?”
모형한테야 많이 해본 검사였지만 실제 사람한테는 딱 두 번만 해봤던 검사였다. 하지만 며칠 뒤부터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왕 하는 것 선배가 보고 있을 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혈액배양 검사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네, 한번 해보세요. 잠깐 준비물 좀 더 챙겨 올 테니 하고 있어요.”
"네? 저..."
이 말을 남기고 선배는 다음에 인계할 술기의 준비물을 챙기러 나가셨다. 선배한테 도움을 받으면서 할 계획이었는데 계획이 꼬였다. 뭐 그래도 모형한테 100번 넘게 해 본 검사였기 때문에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준비물 챙겨 올 동안 아무것 안 하고 가만히 있는 한심한 인턴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선배가 다녀올 동안에 혈액배양 검사를 해놓기로 결심했다.
아주 당당하게 토니켓을 묶고 소독을 하고 바늘을 찔렀다. 하지만 모형 팔의 인조혈관과 실제 사람의 혈관에는 큰 차이가 있었고 피는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 여기서 멈추고 선배를 기다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왠지 한 번만 더 하면 피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결국 나는 “저.. 딱 한 번만 더 찌를게요.”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3번 정도 더 찔렀으나 역시 피는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찌를게요.”
“악!!!!!!!!!! 간호사!!!!!!!!!!!! 악!!!!!!!!!!!!!”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환자가 소리를 질렀다.
준비물을 챙기고 있던 J선배와 간호사들이 뛰어왔고 J 선배가 한번 만에 멋지게 피를 뽑으면서 사건은 다행히 진정되었다. 물론 나와 J선배는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사과를 했고 말이다.
“괜찮아요. 처음엔 다 못해요. 좀만 지나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다행히 J선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내가 인턴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과 걱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 나는 정말 자신감에 차 있는 상태였는데 이 자신감은 정말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났다. 그날 밤새 채혈 잘하는 법, 동맥과 정맥의 주행 등을 다시 찾아봤다. 앞으로가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