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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렐라 Dec 29. 2018

캠핑, 호우특보를 만나다

미국, 메인(Maine) 주

“여행자는 집이 없지만, 여행자라 눕는 곳이 집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텐트를 치면 그곳이 집인 자전거 여행자에게 이보다 더 맞는 말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하루 동안 자전거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평균 70-80km.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에서 자전거를 타노라면 며칠씩 마을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언제든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온갖 캠핑용품을 챙겨 나왔다. 낯선 곳에서의 캠핑이라니! 신선한 공기, 고요한 자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 않은가. 


자전거 안장에 오른지도 어느덧 5개월, 드디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날이었다. 캐나다에서 보낸 4개월 동안 다양한 캠핑장을 경험해 봤던 우리. 미국에서의 캠핑은 어떨까, 두근두근 요동치던 마음을 붙잡고 하루를 마무리할 캠핑장에 오후 느지막이 도착했다. 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사무실의 할머니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 캠핑장 지도를 펼쳐 보였다. 우와, 캠핑 사이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이 캠핑장, 지도만 봐도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미국의 스케일이란!!!! 


사무실에서부터 지정된 우리 사이트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마침내 도착한 우리 자리는 숲 한가운데였다. 넓기도 넓은 우리 자리를, 구름을 찌를 듯 키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아늑하게 감쌌다. 정말이지 완벽한 캠핑장이었다. 이 환상적인 곳이 오늘 하루 우리 것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사이트 중앙에 텐트를 쳤다. 조금만 뒤로 걸어가면 멋있는 호수가 있고, 밤에는 이 키 큰 나무들 위로 별이 가득 반짝이는 곳. 오늘 하루 자전거를 타고 육로로 국경을 넘고, 새로운 나라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나 자신이 무색하게, 미국은 참 좋은 곳이었다. 너무 좋은 곳이야!!


사무실에서 우리의 텐트 사이트로 가는 길
사이트 72번, 이 넓은 자리가 오늘 밤은 우리 것!


오붓하게 저녁을 해 먹고,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보며 감탄하다 10시쯤 텐트에 누웠다. 남편과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툭, 툭' 하고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이 조금 흐리다 싶어 이미 텐트 위에 방수비닐을 덮어둔 터였다. 하, 역시 캠핑도 여러 번 하니 실력이 늘어난다. 미리 비를 예상하고 준비할 생각을 하다니! 남편의 선견지명에 새삼 감탄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쏴아아 아아아ㅏ아아아 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아ㅏ아아아아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잠깐 잠에 들었다가 텐트를 무너뜨릴 듯한 소리에 놀라 깼다. 보통 비가 아니었다. 혹시나 하며 날씨 어플을 열어보니, 지금 이 지역에 호우특보가 내려져 있다는 알림이 떴다. 호우특보라니, 얇디얇은 비닐과 천 쪼가리가 겨우 지붕 역할을 하는 이 텐트 안에, 호우특보의 한 중간에 우리가 누워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텐트 친 곳이 다른 곳에 비해 낮은 지대였는지 조금씩 텐트 밑으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자리가 넓다고 신이 난 나머지 확인도 하지 않고 텐트를 친 대가였다. 텐트 밑바닥이 물침대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금씩 스멀스멀 물이 새어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매트며 침낭이 다 젖고 텐트 안에 물이 고였다.


간밤, 코펠로 파낸 물길의 흔적


상황 판단이 빠른 남편은 즉시 밖으로 나가 그 폭우를 맞아가며 텐트 주변으로 물길을 파냈고, 나는 텐트 바닥의 물을 열심히 밖으로 빼냈다. 고인 물을 빼내고 다 젖은 텐트 바닥에 급한 대로 휴지며 수건, 손수건을 깔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고 또 닦아냈다. 캠핑장이 숲 안에 위치해 있으니 이 강한 빗줄기를 버텨줄 지붕이 없어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물기를 닦아내며, 11시쯤에는 잠잠해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남편이 파낸 물길 덕에 더 이상 텐트 안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계속되는 폭우에 지대가 잠기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오들오들 떤 지 어느새 3시간. 밤 11시면 그친다던 비는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잦아들었고 그제야 겨우 마음을 쓸어내린 나는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살았구나. 



다음 날 아침. 따뜻한 해가 떴다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세찬 비는 없었던 일인 듯 예쁜 해가 텐트를 비추었다. 일어나자마자 축축해진 침낭과 매트를 꺼내 들고 햇빛 아래 널었다. 키 큰 나무 이쪽 가지에 티셔츠 하나, 반대편 가지에 바지 하나. 바닥에 텐트며 비닐이며 온갖 것을 다 널고 보니 거지도 이런 거지들이 따로 없다. 우리 집이며 교통수단인 텐트와 자전거는 어젯밤 남편이 급히 물길을 만들며 파냈던 흙에 덮여 더럽혀져 있었다. 4개월간 캐나다에서 자전거를 타며 했던 캠핑 경험 덕분에, '이제 캠핑 정도야 껌이지!'라고 생각했던 내 자만심은 온데간데없다. 매일 마주치는 새로운 상황에 우리는, 매일같이 초보였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낭만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캠핑은 한 번도 마음처럼 쉬웠던 적이 없다. 망가진 폴대를 가지고 겨우 텐트를 세워 놓기도, 땅다람쥐가 텐트에 구멍을 내기도, 곰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하는 우리의 캠핑. 혼이 쏙 빠졌던 간밤의 난리부르스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아침으로 먹으려고 데운 인스턴트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고, 캠핑장을 찾아가야 한다. 모닥불은 없어도 된다. 낭만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 밤은 제발 보통으로, 별 일 없으며, 기억에 남을 일이 생기지 않을,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의 캠핑이 되기를 바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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