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맛
“ 다음 주 방학하면 집에 갈 거야? ”
“ 응. 그러려고 해. 3학년 올라가면 아무래도 내려가기 어려울 거 같아.”
“ 이번 방학에 뭐 계획 있어? 나랑 같이 안 갈래? ”
“ 여수? 가고 싶은데 울 엄마 아빠가 허락해야지. 쉽지 않을걸? ”
“ 걱정하지 마. 내가 허락받아 줄게 ”
장담하는 경이가 좀 멋져 보이는 순간.
경이는 고교 시절 내 단짝 친구다. 여수에 계신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님은 삼 남매 교육을 위해 일찍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을 전학시켰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타지 생활을 한 그녀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일 년에 한두 번 내려가는 고향 집에 단짝인 친구와 동행할 생각을 하니 설레는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토요일 오후.
겨울방학을 한주 앞두고 경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먼저 엄마와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운을 띄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엄마는 예상외로 쉽게 허락을 해주셨다. 이제 관건은 아빠였다. 둘은 머리를 굴리며 예행연습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신 아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경이는 어려워하지 않고 아빠에게 다가가 애교스러운 말투로 부탁했다.
“ 아버지~ 여수 부모님이 윤경이 보고 싶다고 놀러 오라고 하셔요. 3학년 올라가면 여수 가는 것 당분간 어려울 것 같은데 이번에 같이 다녀오면 안 될까요? ”
나는 순식간에 아빠의 허락을 받아낸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뛸 듯이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 이외에 다른 사람이랑 여행을 가거나 외박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기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D-day
초겨울 바람에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진눈깨비가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엄마는 추운 날씨에 감기 들겠다며 목도리를 꺼내 내 목에 둘러 주셨다. 나는 엄마가 만든 유부초밥 한 개를 입에 넣고 혹여 초행길에 늦을세라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역으로 향했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여수행 열차에 탑승한 두 사람은 좌석표를 확인하고 제자리를 찾아 짐칸에 짐을 넣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긴장이 풀렸는지 간밤에 설친 잠을 보충하듯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잠이 깬 두 사람은 엄마가 준비해 준 유부초밥을 꺼내 먹고는 열차 내에서 파는 사이다를 사서 먹었다. 배도 두둑하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자유시간을 만끽하듯 곧이어 그녀들의 수다 타임은 시작됐고 간간이 열차에서 파는 간식도 먹으며 장장 여덟 시간이 넘는 길고 긴 여행의 종착역인 여수에 도착했다.
매표소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경이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마중 나온 삼촌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케리어를 가져가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앞장서서 주차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둘은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시던 경이 어머니가 양팔 벌려 두 사람을 반겼다.
“ 오~매 내 강아지들 왔는가! 어서 오니 라! 먼 길 오느라 힘들었제? ”
“ 그간 안녕하셨어요? 서울에서 뵙고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 오~야! 오~야! 잘 있고말고. 내가 바빠 서울도 잘 못 올라가고”
“ 내는 우리 강아지 걱정 땜시 한시도 맴을 못 놓고 있는디 울 아기가 옆에서 친하게 지낸다고 한께 이자는 맴이 솔찬히 놓아부러 ”
“ 참! 거시기 내 정신 좀 보소. 어머니도 건강 하시제? ”
“ 네~ 경이 걱정은 마세요. 학교생활 잘 하고 있어요.”
“ 옴마! 울 아기들 먼데 오느라 시장하것네. 엄니가 얼른 밥 차려 줄라니까 쫌만 기둘려~잉 ”
경이는 식사 준비로 바쁜 엄마를 뒤로하고 나를 데리고 집안 밖을 안내했다. 잠시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문지방 위에 걸쳐놓은 명주 천을 들여다보고는 적잖이 놀랐다. 하얀 천위에는 아기자기한 색실로 수를 놓은 한 폭의 그림이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 역시 경이 어머님 솜씨였다.
“ 야들아~ 어서 오니라. 배고프것다. ”
어머니 부름에 방으로 들어가니 누가 봐도 전라도식 한 상차림. 딸을 위해 만든 정성 가득 담긴 엄마의 밥상이었다.
“ 와~ 이 많은 음식을 언제 다 만드셨어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
“ 울 아기 입맛에 맛 아야 할 텐디. 오늘은 대충 차린 거 먹고 내일 맛난 거 먹으러 가자~잉 ”
상위에는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음식 종류가 다양했고 눈대중으로 훑어도 열두 가지는 족히 넘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제일 눈에 띄는 반찬은 김치였는데 배추김치. 총각무. 동치미. 파김치. 비슷한 종류의 김치들이 대 여섯 가지가 넘었다. 그중 난생처음 보는 김치도 있었다.
“ 어머니, 이건 나물인가요? ”
“ 아니 고것은 고들빼기김치여. 옆에 있는 건 갓김치고. 여수 돌산 갓김치. 아가! 맛이 어떤가 함~ 먹어봐.”
어머니 권유로 고들빼기를 한 젓가락 집어 맛보는데 작은 삼 뿌리 모양의 고들빼기는 매운 고춧가루 양념에 깨로 범벅이 된 김치였다. 씹을 때 쌉싸름한 뒷맛이 입맛을 돋우고 밥을 부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다음 갓김치. 무청처럼 생긴 모양의 갓김치는 일반 김치 양념보다 젓갈 맛이 더 진하고 갓 특유의 톡 쏘는 맛이 감칠맛을 더해 이 또한 밥을 부르는 마성의 반찬이었다. 여수에 머무는 동안 밥상에 고들빼기와 갓김치가 있으면 무조건 두 그릇 뚝딱! 잘 먹는 내가 보기 좋았는지 어머님은 서울 집에 내게 줄 고들빼기김치와 갓김치를 같이 담아 보내니 집에 가져가라고 하셨다.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새로 알게 된 두 가지김치를 해 달라고 엄마께 부탁했지만, 여수에서 먹었던 그 맛은 아니었다. 한동안 여수 김치가 생각날 때면 쪼르르 경이 집으로 달려가 맨밥에 고들빼기김치랑 갓김치만 꺼내 와그작거리며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곤 했다.
우리는 배고픔만큼이나 마음이 허할 때 자신만의 ‘영혼의 수프 ’를 찾게 된다. 때론 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공허한 마음을 포만감으로 다독거리며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사람들에게 음식에 대한 향수는 그리움으로 추억을 되새긴다. 내게 고들빼기와 갓김치는 여수를 떠올리게 하고 어머니와 친구를 소환하게 만든다.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는 주부들의 연중행사인 김장도 옛말이고 김치도 사 먹는 세대다. 나 역시 여수 어머니가 담가주신 고들빼기와 갓김치가 생각날 때면 전화 주문 한 통으로 여수에서 내 집까지 배달된 갓 담근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됐다. 한 번은 홈쇼핑에서 솜씨 좋은 장인의 김치가 맛있게 보여 구매를 해서 먹어 봤는데 역시나 난생처음 맛봤던 그 옛날 여수 밥상에 놓인 고들빼기와 갓김치의 맛과는 비교가 안 됐다.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 맛의 비밀은 어머니의 손맛.
오늘도
여전히
나는 그리운 ‘여수의 맛’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