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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Jan 12. 2016

무의식의 주인이 되는 법

무의식을 잡아 휘두를 수 있는 건 의식이다

제목은 좀 거창하지만 하나의 메타포(은유)로 가볍게 읽으면 된다. 방법은 물론 '효과 있는 방법'이다. 요약문이 먼저 나오고 풀이문이 뒤에 나온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 등에 대한 접근은 얼마든지 다양한 경우가 가능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러 방법 중 효과 있는 하나의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무의식의 주인이 되는 법: 요약문


1. 무의식의 우세를 알아채고 인정하기
: 뇌 구조적으로, 의식은 무의식의 우세를 못 뒤집음
: 일단 무의식의 우세를 인정하고 알아채자


2. 이 무의식의 주인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 내게 느껴지고 떠오르는 무엇, 내가 믿는 무엇이 '무의식적 무엇'임을 선명히 눈치챔

: 그래서 필요하다면 멈추어 볼 수 있기




무의식의 주인이 되는 법: 풀이문


1. 무의식의 우세를 알아채고 인정하기

: 뇌 구조적으로, 의식은 무의식의 우세를 못 뒤집음
: 일단 무의식의 우세를 인정하고 알아채자


이미 알고 있다고? 아니다. 프로이트 같은 이를 필두로 인류는 '무의식'이란 영역을 눈치채기 시작했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의식'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간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아이러니하다). 최근에는 뇌과학의 여러 발견이 인간의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밣혀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대중들은 여전히 그에 관심 밖이다.


'뇌 맵핑마인드'(말글빛냄)라는 뇌과학 관련 책 197 페이에 이에 대한 좋은 그림이 있다.


가장 심플하게 이야기하면, "대뇌 변연계에서 신피질로 올라오는 정보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서를 관장하는 부분이 합리적인 부분보다 행동적인 부분에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정서' 영역으로 말했지만 사실은 그 정서라는 것은 뇌의 단일 기관이 아니라 피질 아래의 여러 영역의 총체적인 정보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림 속 화살표의 개수를 보면 9:2 정도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의식'이라는 것도 그렇다. 도대체 의식이 뭘까? 다양한 관점과 의견,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주의의 초점이 맺힌 상태'라고 해 보자. 즉 인지와 자각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 상태에서 알아차리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내용들이다. 보통 '의식이 있는 상태'라고 표현되는.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의 전체 의식활동(의식과 무의식 영역을 모두 포함한)에서 이렇게 주의의 초점이 맺히는 의식 영역 혹은 범위는 정말 좁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의의 초점은 뇌의 전체 활동이 어느 정도 임계치 이상일 때만 맺히며 그 아래일 때는 흩어져 버린다. 우리가 낮에 깨어 있는 중에도 조금만 주의를 놓으면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하며, 그리고 졸 때는 거의,  잠잘 때는 완전히 사라진다. 기절했을 때도 사라진다. 수술을 위해 수면마취 등을 하게 되면 뇌 활동이 점점 잦아들면서 동시에 의식의 초점도 점점 흐려지고 그리고 의식도 점점 흩어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의의 초점이 사라진 상태 혹은 영역에서도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대부분의 입력과 출력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의식'이란 다만 '이미 존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서 알아차리는 상태'라고 해 보자. 물론 여러 다른 정의와 관점이 가능함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심결에(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그 '초점이 맞춰진 상태'를 절대적인 의식으로 여긴다. 그것을 전부로 여기거나 중요하거나 그게 절대적 사실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때에만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아채는, 지각하는, 자각하는 의식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든 뇌과학의 연구 내용이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우리가 '우리의 거의 전부라고 여기는 의식'은 사실은 전체 의식의 영역에서 겨우 초점만 맺혔을 때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초점의 맺힘과  상관없는 아주 넓고 방대한 의식 영역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의식의 우세'를 주장하고 그렇게 믿는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주장하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치 집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지금 집 안에 없고 나만 있다고 내가 집의 주인인양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나'가 그런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의식'이 그러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넓게, 정확하게, 세밀하게, 정밀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초점 맺힌 단편적 의식'이 나의 전부라 여기는 이 착각을 눈치채야 한다. 그리고 실제 뇌의 구조와 의식의 구조에서는 오히려 '의식의 초점' 밖의 의식권에서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초점 맺힌 의식'은 그 범위도 그 역할도 정말 작다. 그것이 영향을 주는 것보다는 그것이 영향을 받는 게 월등히 많다. 대부분은 내 안에 이미 들어왔던 과거의 정보와 기억, 경험, 느낌들이다. 그리고 안에서 만들어진 반응들.


나(초점 맺힌 의식으로서의)는, 그것들이 올라온 후에 내 의식의 초점에 포착될 때에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것은 '이미 일어난 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후  해석'일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후 해석'이 많은 경우 그것이 일어난 진짜 이유가 아니라 좌뇌가 만들어내는 강박적인 거짓말 혹은 상상과 핑계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내용을 상세히 쓴 것이 앞서 올렸던 '자책감과 죄책감. 그리고 좌뇌의 강박 혹은 거짓말' 글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의식의 구성 중에서 '무의식'적 영역 혹은 뇌의 깊은 곳의 우세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알아차려야 하고, 눈치채야 한다. 우리의 '인식하는 의식'은 미처 그럴 모른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그 '인식하는 의식'의 존재만은 아니므로.




2. 그럼 이 무의식의 주인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 내게 느껴지고 떠오르는 무엇, 내가 믿는 무엇이 '무의식적 무엇'임을 선명히 눈치챔

: 그래서 필요하다면 멈추어 볼 수 있기


자, 그렇다면 이렇게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올라와 버리는, 그래서 올라온 후에야 지각하게 되는 이 무의식의 느낌, 감정, 생각에 대해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냥 하릴없이 앉아 당할  수밖에 없을까?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활용하는 것'이다)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면 애초에 이런 글도 쓰지 않았다. 방법은 있다. 물론 쉽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바로바로 된다고도 하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익숙해지고 쉽게 되려면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다. 예외는 없다.(물론 그 전에 먼저 '동의와 받아들임'이 필요하긴 하다. 이 관점과 방법론에 대해서 말이다)


다만, 되도록 정확한 이해와 포착 그리고 되도록 정확한 접근과 방법론이  있을수록 우리는 더 잘 익힐 수 있다. 방법이 좋으면 과정과 결과도 좋은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함께 공유해 보자.


이론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올라온 후, 의식이 초점권에 들어온 후에야 자각되는' 무의식의 신호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즉, 이미 나타난 것을 그 전으로 되돌리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강력한 방법이 있다.


'우리가 의식권에서 느끼고, 자각하고, 떠올리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바로 '무의식권에서 올라오는 것'임을 선명히 아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걸 이론적으로, 내용으로 안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게 아니다. 진짜 안다는 것 혹은 여기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의 의미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감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알아챈다'는 표현만으론 좀 부족하다. 좀 더 더한다면 사실은 '기존의 의식적 패턴, 고집, 믿음, 요구'를 멈추는 것이기도 하다.


주의할 것은, 그걸  '흘려보내고 말고' 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도, 참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모두 반쪽짜리 해결책이다. 그러한 어떤 구체적인 대응(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혹은 그 이전에 우선은 모든 것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임을 선명하게 눈치채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절대시하고 전부시하고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그 '고집, 패턴, 집착, 욕구, 본능'을 멈출 수 있는 것이다.


핵심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기'이다.


알아챔과 멈춤이  선명할수록  그다음 적절한 행동과 선택은 저절로 나온다. 물론 당장에 그렇게 되진 않겠지만 점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애초에 멈출 수 없으면 계속 같은 패턴이 반복만 될 뿐이다. 무언가 애써서 하려고 해도 그 역시 무의식의 과거 패턴의 작동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은 '멈출 수 있기'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멈추기'는 보통 억압이나 회피, 무시 등으로 간다. 그러면 여전히 그 영향은 남게 되며 뒤에도 계속 반복하게 된다. 당시엔 멈추어도 후에 다시 발동하게도 된다. 더 강화되곤 해서 말이다. '멈춤'은 '알아챔'을 전제로 해야 한다. 혹은 '고집의 버림, 포기' 등등.


그런데, 또 무의식에서 오는 느낌, 반응, 생각 등을 '그것이 절대적인 사실, 전부, 중요해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등으로 무조건 여기지(믿지) 말고 '조건 없이' 멈출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알아챔'이기도 하다. 즉 '극성이 둘인 하나'인 셈이다. 알아챔과 멈춤이 말이다.


(# 주의해야 할 것은, '멈추는 것'이 목적이거나 그 방법이 아니란 점이다. 그렇게 오해를 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멈추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결과로서의 과정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에게 올라오고, 떠오르는 모든 것이 일단은 무의식의 자동 반응임'을 알아채면서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물론 처음부터 명확하게 그렇게 되는 건 아니므로 처음에는 의도적인 혹은 의식적인 '멈춤'이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러면서도 그 멈춤이 목적이 아니고 목표가 아님을 스스로 유념한다. 왜냐하면, 멈춤을 위한 멈춤은 단지 또 하나의 '무의식적 패턴'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멈춤이 아니라 상황과 필요에 따른 선택이 본래의 목적이겠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다스림'은 의도적인 다스림으로 접근한다기 보다는 그 본래의 정체, 구조, 프로세스를 파악해서 알아채는 것이 핵심이겠다. 그 알아챔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그 후의 적절한 다스림은 자연스럽게 오는. 관건은 '무의식의 다스림'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런 전체 흐름'을 얼마나 잘 포착하고 타느냐이다. )




'효과 있는 방법'이라고 하고 쭉 썼지만 보는 경우에 따라선 다소 막연하게 읽힐 수 있다.  필자에겐 아주 구체적 방법이고 실제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사람에 따라선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꼭 이 방법만 있다고 말하진 않겠다. 


다만 모든 것은 '익숙함'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 쉽고 어려움과 별도로, 대상에 대해 익숙하면 쉽게 느껴지고 낯설면 어렵게 느껴진다. 즉 여기에 쓴 방법도, 익숙하게 되면 될수록 쉬워질 것이다. 지금 어렵게 느껴지는 건 단지 이런 접근과 방법이 낯설어서 그런 것일 뿐 실제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다.


어차피 이 모든 내용은,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이 방법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막연할지라도 유용한 부분이 있다면 한번 이용해 보기. 그게 전부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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