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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을 읽고

빈 서판이 아닌 인간에 과학을 적용하기 위한 세부 사항

대중이 과학을 대하는 방식은 개판이 따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애초에 바꿀 마음이 전혀 없는 대립되는 주장 중 한쪽 편에 든다. 종종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태그가 붙은 인터넷 검색물을 찾아내 오지만, 그와 완벽히 반대되는 주장의 근거 또한 ‘과학'이라는 태그가 붙어 있다 해도 이 토론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개의 주장에 대해 완전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 논문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게임은 중독되어 게임 뇌를 만든다 vs. 게임은 중독으로 분류할 수 없다. 동성애는 환경 요인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vs. 동성애는 선천적으로 유전된다. 성인의 폭력 성향은 어릴 적 부모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다 vs. 성인의 폭력 성향은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이 수많은 논증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의 머릿속 ‘이미 정해진’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싸움을 하며 모든 증거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갖가지 논문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세워진다.


주장되는 수많은 내용들에 비해 ‘주장하는 사람’은 의외로 굉장히 쉽게 분류된다. 그들은 축이 서너 개인 복잡한 다차원 공간에 흩어지지 않고 일차원의 어떤 축에 일렬로 늘어설 뿐더러, 어떤 효과에 의해 축의 중간에 몰리지 않고 양쪽으로 치우치게 분포된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가 환경적으로 영향받아 ‘전염'되는 성질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마찬가지로 폭력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며 이런 사람은 흔히 대한민국 근현대사 국정교과서 논쟁도 찬성 쪽으로 표를 던질 것이다. 동성애나 폭력의 선천성 혹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주의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복지 정책에도 어느 정도 동조하고 예산을 늘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경향이 클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두 파로 나뉘고 그 사람들은 그룹 내에서 서로 간의 주장과 의견에 의해 쉽게 동조하는데, 이러한 결속력 자체가 사람들의 주장을 쉽게 번복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옆 사람이 찬성했고 그룹 내 많은 사람들이 찬성했으니 이 문제는 내 생각이 맞다.” 같은 것이다. 같은 의견을 가진 정치 동료가 출처가 의심되는 과학 논문을 가지고 나왔다 해도 그 논문은 그룹 내에서 검증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쉽게 공유될 것이다. 대니얼 카네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따르면 사람은 남의 말보다는 자기의 말이 더 옳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잘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얘기하고 싶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증거들을 수집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나의 주장을 쉽게 포기하고 남의 의견을 따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따라야 하고 그 신념은 내가 윤리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옳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오며, 상대편의 사소한 증거에 나의 신념을 손쉽게 접는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을 때, 이 사람은 ‘과학'이라는 것이야말로 상대방을 논파할 만큼 강력하고 믿을 만한 동지로 삼고 있음이 틀림없다. 과학은 언제든지 사실이며, 과학은 논파될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은 ‘옳은 말만 주장하는' 나의 편이고, 과학 그 자체에 윤리적 정당성이 내재되어 있다. 과학은 선이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실과 증거들이 이리저리 시달리게 된다. 상대방이 들고 나온 과학은 과학이 아니란 말인가? ‘주장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상대방의 논문을 쓴 과학자는 실제로는 매우 비윤리적인 사람이고, 정치적으로 편향되어서 그 편향성이 자신의 연구까지도 망치고 있다. 심지어 그의 뒤를 철저히 캐 보면 연구비를 횡령한다든지 하는 비리가 발견될 것이다.” 즉, 내가 증거로 삼은 과학이야말로 과학이며, 상대방이 증거로 삼은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온갖 비윤리와 비리로 점철된 사이비과학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두 가지의 잘못된 생각에 기초해 있다. 첫째, 과학적 사실은 ‘옳다'. 둘째, 과학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은 옳지도 않고 또한 대부분은 아직 사실도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과학을 잘못된 ‘도구'로써 아무렇게나 휘두르게 만든다. 애초에 과학은 그렇게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정해져 있는 주장을 뒷받침하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간의 결속력을 다지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은 옳은가?

과학이 사실이라고 밝혀 낸 모든 것들은 정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특정 직업에 대한 성차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여성보다 남성이 더 큰 까닭은 애초에 남성이 위험한 것에 도박적으로 집착하는 성향이 큰 환경에서 진화적으로 잘 적응해 왔기 때문이다. 과학은 단지 여기까지만 말한다. 여기서, ‘권력이 있는 자리에 남성을 앉히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이 도출되는가? “과학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그래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의 권익을 더 보호해 주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균형을 맞춰 주는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과학이 말한 사실과 그로부터 의견을 도출하기까지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긴 다리가 숨겨져 있으며, 과학은 이 다리를 건너는 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과학이란 ‘원칙'이나 ‘법전'이 아니며 단지 자연 세계에 대한 기술(statement)에 불과하다. 오히려 여기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누가복음)” 같은 황금률이 더 명쾌하면서도 단순한 원칙으로 작동할 것이다.


과학은 사실인가?

과학이라고 밝혀진 것들은 모두 진실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이라고 딱지가 붙은 것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언제나 내재하고 있으며, 실제로 과학이라는 행위의 거의 대부분은 ‘사실임'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이것에 대해 모두 착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같이 ‘사실임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해도, 이미 그 오차가 거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사실임이 아닐 확률이 극적으로 낮은' 것들만을 봐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밀한 하드사이언스적인 성향을 모든 과학, 특히 인간에 관한 과학에까지 적용하려 하니 사단이 난다. 현재 과학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동성애는 선천성이 주요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주장의 근거로 삼을 때 아래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에 실제로 동성애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밝혀졌다 치자. 당장 내년에, 어떤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비리를 저질러 본 적도 없는 권위적인 과학자가 그렇다고 밝혀 냈다고 하자. ‘동성애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니 어쩔 수 없이 태어난 동성애자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자'라고 주장하던 진보적 평등론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주장을 바꿔 동성애 치료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 모으기 운동이라도 할 것인가? 사람들이 상반된 주장에 대해 동시에 상반된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상반된 과학적 사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현상의 원인은 이것이 아직도 ‘사실임을 증명해 나아가는' 과학의 아주 기본적인 절차를 진행중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과학은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중들의 생각만큼 큰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 과학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다른 쪽을 노려 봐야 한다. 과학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정의하고 측정하기

낙태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정하는 일은 생명윤리와 얽혀 있다. 우리는 의식이 있는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는 ‘황금률'에서 출발한 도덕 관념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은 태아는 생명이니 죽이면 안 된다'가 아니다. 태아의 의식만큼 산모의 행복도 황금률에 따라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고, 과학이 여기서 실제로 하는 일은 몇 개월짜리 태아를 낙태했을 때 증가하는 산모의 행복과 정확히 동등하느냐를 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해 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태아가 의식이 있는 생명이냐 아니냐 혹은 “언제부터 생명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싸우기보다는, 그저 과학에 그 답을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답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은 점진적으로 발달한다이고, 과학이 말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이다. 그 이후로부터는 알아서 해야 한다.


본성과 양육

살인자의 폭력성이 유전자에 내재된 본성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어서 무죄를 선고받는 무시무시한 사회가 닥쳐올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과학은 폭력성을 선천적이라고 밝혀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재판장에서 변론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함부로 ‘선천적인 폭력성은 봐줘야 한다’라고 말해 버리면 안 된다. 첫 번째 이유는 폭력성을 내재하고도 자신의 심성을 잘 컨트롤하여 죽을 때까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 사람도 충분히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선천성을 무죄로 인정한다면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의 또 다른 단면인 ‘후천성(거친 주변 친구들과 타락한 도시에 영향받는)’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무죄를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은 무죄다, 혹은 이 사람은 유죄다라고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하에서 폭력성 같은 황금률에 어긋나는 인간성이 발현되는지 조사하고, 그 요인을 사회로부터 억제하거나 제거하도록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예산 낭비하지 않고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해 주기

어린이의 성격과 사회성의 형성은 부모의 양육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놀라운 가설이 ‘주디스 리치 해리스’라는 심리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스티븐 핑커는 이 가설을 한 챕터로 할애하여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많은 교육 시스템이 부모 양육의 효과를 절대적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해리스의 가설에 따르면 이에 쓰여지는 돈은 완벽히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것을 교육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써도 좋다는 말인가?” 황금률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해리스의 가설을 받아들이면, 아이가 정신분열병에 걸리거나 동성애자가 되어도, 적어도 자신이 “이혼을 했기 때문"이라거나 “자신이 잘못된 교육 방식을 썼기 때문"이라는 쓸데 없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인간은 선하다/악하다" 혹은 “인간은 빈 서판이다" 식의 커다란 담론의 남발은 디테일한 문제를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과학은 이 디테일을 꼼꼼히 따져 보고 황금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살펴 보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그런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황금률은 아무리 따져 봐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로 과학과 윤리는 통섭할 수 없으며, 문과생에게도 변함없이 할 일은 주어질 것이다.


151110

The Blank Slate - Steven Pinker

이 책은 인간이 '빈 서판'이며, 때문에 그 안에 모든지 담을 수 있다는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희망에 찬 주장이 얼마나 디테일이 없고 인간성의 특성에 대한 많은 것을 가려버리는 지를 말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인지심리학자로서의 스티븐 핑커와 세계평화에 힘쓰는 "석학"으로서의 스티븐 핑커의 균형점이 잘 잡힌 그의 대중서 저술 커리어 최고이자 최후의 책이다. 이제 이 책 이후로 인지심리학이라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한 스티븐 핑커는, 선지자 같은 "석학"의 포지션으로서 (즉, 전문적이지도 않고 남의 연구나 인용하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주로 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나 『지금 다시 계몽』 같은 책들을 쓰게 된다.


스티븐 핑커 컬렉션

1. 『언어 본능

2.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3. 『단어와 규칙』

4. 『빈 서판』 (현재 글)

5.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6. 『지금 다시 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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