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플렉스
"공주, 아빠 지금 들어갈 건데 뭐 먹고 싶어?"
"하리보 젤리."
"응, 그려그려. 아빠가 들어가면서 사 갈게."
일요일 밤. 지인과 술 한잔 하고 거나하게 취한 남편이 딸에게 전화해서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본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대화다.
유독 딸바보인 남편이 귀갓길에 딸에게 전화해서 주전부리를 사다주는 것. 이상할 것이 뭐가 있겠나.
오히려 가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15분 뒤 전화가 온다.
"나 지금 편의점인데 젤리 계산하고 있어."
"알았어. 빨리 와."
"아니, 나 이거 못 들고 가. 아들이랑 딸 데리고 편의점으로 와."
"뭐?"
"편의점에 있는 젤리 다 털었어."
"뭐? 미쳤어?"
"공주가 젤리 먹고 싶다잖아."
"이빨 썩어. 한 개만 사 와."
"이미 직원이 찍고 있어. 빨리 와."
"아들 지금 개인 운동 중이야. 나 혼자 갈게."
전화를 끊고 속으로 욕을 하며 장바구니를 챙긴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그 놈의 병이 도졌구만.
일병 아빠의 플렉스 병.
작은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아파트 입구에 있는 편의점으로 걸어간다.
그 사이를 못 참고 남편이 또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어차피 금방 볼 걸.
편의점에 들어서자 입이 떡 벌어진다. 작은 편의점 장바구니 네 개에 젤리가 채워져 있다.
"이거 뭐야?"
"젤리여."
"아니,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거 다 살 거야?"
"그려. 공주가 먹고 싶다잖아."
하... 혈압이 치솟는다. 알바생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바코드를 찍어대고 있다.
어차피 말려도 소용 없음을 함께 17년 넘게 살면서 알고 있지 않았나.
착찹한 심정으로 장바구니 가득 담겨 있는 젤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매운 맛이 나는 젤리 몇 개를 뺀다. 어차피 아무도 안 먹을 맛이라고 남편을 설득한다.
그냥 다 사라고 하지만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매운 맛만 빼라고 허락한다. 하....썩을
큰 봉투로 네개를 채우고 나서야 바코드 찍기가 끝났다.
금액은 통신사 할인 받아서 445,100원
수량 317개.
남편카드로 파워결제.
어차피 본인이 낼 카드 금액. 며칠 동안 과일 대신 젤리 먹게 생겼네.
결국 아이들까지 불러 양손 가득 젤리를 담은 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오는 내내 동생에게 앞으로 아빠한테 먹고 싶은 거 말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고 딸은 오빠에게
꾸지람을 들어 시무룩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딸도 이런 그림을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하리보 젤리 하나를 원했던 것인데.
바코드만 찍고 실제 결제 했을지 의심하는 사람 있을까 싶어 영수증도 찍어왔다.
젤리 이름에 뭔 놈에 알갱이가 이렇게 많은 걸까.
집에 와서, 오늘 아침까지도 꼴 보기 싫어서 다용도실에 봉지채 팽개쳐놨다가 출근 전 몇개 챙겨서
회사에 아이 있는 집에 나눠줬다.
생각할수록 진상이네.
당분간 밥 대신 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