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푹 빠져 지내던 때에는 모든 것이 커피로 연결되어 보였다. 지나치던 길에서 케냐, 에티오피아, 핸드 드립, 에스프레소 같은 단어가 스쳐 보이기만 해도 부엉이 눈처럼 휙 돌아가 글자를 캐치하고 정체를 파악했다. 카페 이름인지, 어떤 문구인지.
설렁탕집에 설렁탕을 먹으면서도 뭔가 조금 밍밍하면, “으음, 추출이 조금 덜되었군. 이럴 때는 사골을 더 넣거나, 시간과 온도를 높여야 하는데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맛이 전반적으로 싱거울 때면, “소금을 약간 넣어야지. 역시 커피도 그렇고, 약간의 짠맛은 전반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단 말이지.”라는 식으로 온종일 커피 생각하면서 지냈다.
물론 혼자 생각으로만 했다. 일일이 다니면서 누군가에게 “에헴, 저기요. 여자 친구와 다퉜다고요? 그건 어디까지나 온도의 부족입니다. 조금 더 온도를 높이고 단맛을 추가하세요. 그러면 여자 친구가 화해하자고 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고 다니면, 이상한 취급을 받으며 밤길에 계란을 맞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재즈에 푹 빠져서 지냈던 때가 있었다. 특별히 할 일 없는 한가한 휴일이면 집에 얌전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재즈를 듣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멍하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재즈를 듣고 있었는데, 엘라 피츠제럴드의 음악이 나오자 “으음, 이거 왠지 에티오피아 같은 목소리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져, “감정이 풍성하고, 단단한 중음의 우아함이, 마치 향기가 풍성하고 단맛이 부드러운 에티오피아를 닮았어.”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가 붙어서 다른 음악도 이것저것 들었는데. 쳇 베이커는 과테말라, 짙은 나무색의 분위기가 있는데 중후하고 스모키 한 분위기가 닮았다. 스탄 게츠는 파나마, 연두색과 주황색 느낌으로 살랑살랑한 보사노바 선율이 마치 가녀리고 섬세한 분위기 같았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음, 강렬한 붉은색의 분위기. 케냐 같기도 하고, 콜롬비아 같기도 하다. 음악에 따라서는 브라질 같기도 하다. 역시 다채로운 음악 색깔을 보여주는 마일스군. 하고 조용히 감탄했다.
그러다 점점 재미가 붙어 소설책을 펼쳤다. 당시 읽고 있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훑어보고, “으흠,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의 문장이 마치 파나마 커피와 스탄 게츠와 비슷한 느낌이야. 나중에 파나마 커피를 마실 때는 스탄 게츠 음악을 틀고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어야겠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런 조합에 맞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신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어디까지나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을 뿐. 언제나 마시고 싶은 커피는 따로 있고, 듣고 싶은 음악은 그때마다 다르고, 읽고 싶은 책도 따로 있다. 모두 제각각 내 마음대로다.
아무튼 커피에 푹 빠지면, 세상이 온통 커피로 보인다. 커피. 커피. 커피. 그렇게까지 커피에 푹 빠져서 삶이 더 나아진 게 있는가 하면, 으흠… 잘 모르겠다. 다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뭔가 있지 않을까.
가끔은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고 느낀 적 없는지요. 모든 게 다 비슷한 규칙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무엇이든 자세하게 살펴보고 본질의 규칙을 하나씩 따져보면, 모두 비슷하다. 어쩌면 세상은 모두 똑같은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대나무가 자라는 방식이나 연어가 알을 낳는 방식에도 같은 시스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쪽을 보고 다른 한쪽을 예측한다. 이를테면, 커피와 연결된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 삶에 와서 닿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커피를 보며 내 삶을 살펴본다. 살아가면서 체득한 경험으로 시스템의 규칙을 감지하고, 이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분명한 건. 아무 일 없는 한가한 휴일에 커피를 내리고, 재즈를 들으며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 그때는 문득, ‘이렇게 사는 것도 좋다.’라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커피와 연결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튼 뭐, 이런 인생.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