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man Returns, 1992)
요즘 사람들에게 배트맨 영화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롤로지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필자 최고의 배트맨 영화는 팀버튼 감독의 [배트맨 리턴즈]입니다. 전작인 [배트맨] 속 잭 니콜슨의 조커 역시 인기가 많았지만 캣우먼과 펭귄맨의 더블 빌런 체제와 팀버튼 특유의 잔혹동화 느낌의 색채는 속편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 영화 리뷰는 [배트맨 리턴즈]로, 팀버튼 전성기 시절의 연출 능력과 추억 보정 없이 지금 봐도 재밌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 줄 거 리
흉측한 기형을 갖고 태어나 하수구에 버려진 펭귄맨은 자신을 버린 고담과 부모에 강한 복수심을 갖는다. 이에 명망 있는 기업가 맥스 슈렉을 납치해 그의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을 빌미로 자신을 하수구에서 나와 떳떳한 고담의 시민으로 만들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맥스 슈렉은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발전소를 만들기 위해 펭귄맨을 역이용해 그를 시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한편, 슈렉의 비서인 셀리나는 슈렉의 비리를 발견하게 되고 슈렉에게 죽을 위기를 겪는다. 이후 깨어난 셀리나는 자신을 ‘캣우먼’이라고 자칭하고 가면을 쓴 채 슈렉에게 복수하려 한다.
히어로 골수팬들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는 사실상 엄청난 설정 파괴투성입니다. 일단 전작만 봐도 웨인 부부의 강도 살해범이 조커로 나오지만 이는 팀버튼 영화 속 한정 설정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많은 분들은 아직도 다른 배트맨 영화를 보게 되면 웨인 부부를 강도 살해한 사람이 조커 아니냐는 말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것은 속편 [배트맨 리턴즈]를 오게 되면 더욱 심해지는 데, 흔히 펭귄맨을 펭귄처럼 생긴 악당으로 기억하는 데, 원작 속 펭귄맨은 단순한 별명일 뿐 고담시 갱단 두목입니다. 영화 속 모습이 워낙에 강렬해 코믹스를 읽지 않은 이들에게는 펭귄맨의 모습이 딱 [배트맨 리턴즈] 속 모습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색이 욕을 먹기는커녕 역으로 배트맨 만화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만큼 리턴즈의 설정 변주가 탁월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흔히들 [배트맨 리턴즈]에서 악당을 캣우먼과 펭귄맨, 두 명으로 기억하지만 진정한 보스는 ‘맥스 슈렉’에 가깝습니다. 고담시를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하수구에 사는 괴물도, 가면을 쓴 자도 아닌 비리로 가득한 기업인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당시 워너브러더스는 이 영화의 주 타깃 연령을 어린이로 맞췄기 때문에 악당의 포커스를 펭귄맨과 캣우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 봤던 기억에는 펭귄맨과 캣우먼뿐이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금 영화를 보자 맥스 슈렉이 눈에 띄었습니다.(이후 영화가 흥행했음에도 아동 영화에 맞지 않는다며 팀버튼을 경질하고 조엘 슈마허를 앉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그런 메시지와 아동 영화라는 지점, 두 경계의 조율이 더욱 탁월하게 느껴집니다. 배경과 인물은 과하게 키치적인데 핵심 악당과 메시지는 무언가 그 당대 현실을 꼬집는 부분, 제가 말씀드렸던 잔혹 동화 색채가 짙다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영화는 컬트적인 분위기 말고도 연출 역시 좋습니다. 영화 초반부, 펭귄맨은 연설 중인 맥스 슈렉을 납치해서 하수구로 데려갑니다. 앞서 줄거리에서 설명했듯이 펭귄맨은 자신의 권리 즉, 고담의 시민으로 떳떳이 지상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펭귄은 슈렉의 비리 문서를 전부 모아서 자신을 돕도록 그를 협박합니다. 그러나 이후 슈렉은 자신의 발전소 설립에 방해가 되는 현 시장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펭귄을 앉히려는 흑막을 계획합니다. 슈렉이 펭귄에게 이를 제안하는 시퀀스는 슈렉 기업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펭귄을 만나러 슈렉이 올라오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퀀스의 끝은 그런 펭귄맨을 아래층의 사무실로 이끌어 그의 계획을 수락하게 만듭니다. 처음 펭귄은 자신의 지하세계로 슈렉을 하강시켜 그를 이용하려 하고 이후 장면에서는 반대로 슈렉이 펭귄을 하강시켜 이용하려 듭니다. [배트맨 리턴즈]는 이렇게 지속적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이용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이는 캣우먼 역시 마찬가집니다. 처음 슈렉이 셀리나를 죽이는 방법 역시 그녀를 고층에서 떨어트리는 것이고 이후 캣우먼은 배트맨에게도, 펭귄맨에게도 각각 한번 씩 죽임을 당합니다.(영화상에서 셀리나 자신의 표현입니다.) 그 방법들 역시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하강’은 인물들의 어두운 부분들을 표현해줍니다. 요즘 말로 흑화 하는 시작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트맨의 경우 이런 하강을 보여주지만 ‘추락’은 하지 않습니다. 펭귄의 술수로 고담의 점등식 행사에 주요 역할을 맡은 여배우를 죽인 살해범으로 몰린 배트맨은 도망가는 과정에서 하강합니다. 그러나 배트맨의 망토는 박쥐의 날개처럼 변해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이때 장면은 점등식 행사에 박쥐 떼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고담 시민들과 그런 시민들 위를 천천히 나는 배트맨을 보여줍니다. 배트맨이라는 인물이 악과 선, 그 중간을 조율해가는 고뇌에 찬 캐릭터임을 하강하는 이미지를 이용해 연출한 부분입니다.
영화에서 캣우먼과 배트맨은 서로 닮은 듯하면서도 또 완전히 반대인 부분들을 강조해서 서로가 대척점의 균형을 이룹니다. 브루스 웨인이 셀리나를 초대해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감추는 둘의 모습이나 배트맨의 여배우 납치 뉴스를 보자 서로 어서 빠져나가려 허둥대는 모습은 둘이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 즉 서로 비슷한 비밀을 가진 동질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는 서로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급하게 빠져나가려는 웨인은 알프레드에게 셀리나와의 만남이 좋았다고 둘러대라고 하지만 이내 그렇다고 너무 저자세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정반대로 셀리나는 알프레드에게 웨인과의 만남이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이후 장면에서는 그럴싸한 배트 케이브와 정리된 슈트들을 보여주며 배트맨의 출동 장면을 보여주지만 셀리나는 운전 중인 차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습니다. 위 장면은 지나가는 영화 속 자잘한 위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후반부 슈렉 발전소 설립 축하 가면 무도회에서 더욱 부각됩니다. 가면무도회 속에서 셀리나와 브루스만이 맨얼굴로 옵니다. 그 둘에게는 맨얼굴이 서로의 진짜 정체를 감춘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함께 춤을 추며 이야기를 나누다 배트맨과 캣우먼으로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와 같은 말을 하게 되고 그제야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셀리나는 가면을 쓰진 않았지만 슈렉의 악행을 막아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총을 꺼내 쏘려고 합니다. 이는 앞선 장면에서 브루스는 자신의 감정과 다르게 알프레드에게 적당한 선을 그어 말해달라고 한 부분과 달리 셀리나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말을 건넨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배트맨 리턴즈]는 이렇듯이 주인공인 배트맨보다 캣우먼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 냅니다. 어째서 주인공보다 악역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린 것일까요? 이 점이 히어로 영화가 가지는 큰 특징입니다. 주인공인 히어로, 배트맨은 악당이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의 존재가 바로 그런 악당이 있어야 성립하는 역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배트맨 리턴즈]는 지금 다시 보아도 재밌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악당이 세 명이나 등장하는 히어로 무비는 아직까지 없기 때문에 이 영화의 작법이 신선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물론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3 역시 악당이 총 세 명이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