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May 24. 2023

홈슬리퍼 세 개 신는 여자

           

맞다.  홈슬리퍼가 세 개나 있다.   


몇 년 전 조기 폐경 진단을 받았고, 갱년기 증상이 내 발에도 내려앉았다. 발은 후끈 대다가도 금세 식어 차디찬 발이 되곤 했다. 한번 식은 발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변화무쌍 날씨가 내 두 발을 무대 삼아  열연을 했다. 이런 이유로  홈슬리퍼에 관심이 생겼고, 급기야 혼자서 슬리퍼 세  신는 여자가 되었다.





하나는 검은색 털 슬리퍼다.

속 안까지 양털이 빽빽한 어그 슬리퍼다. 남들은 한겨울 밖에서 신는 슬리퍼를 나는 집 안에서 신는다.  사계절 내내 가까이 두고 신는다. 그렇다고 매번 신지는 않는다. 새벽 기상하는 날, 추적추적 비 오는 날, 자정 넘어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 그럴 때만 한시적으로 신는다. 적절한 타이밍에 신어주지 않으면 얼음장 같은 차디찬 발을 경험하게 된다. 으악. 생각만 해도 시베리아 차디 찬 기운이 몰려온다.





다른 하나는 초록색 고무 슬리퍼다.

엄마가 일본 여행 선물로 사다 주셨다. 물고기 모양 슬리퍼로 눈동자가 데구루루 움직인다. 발등은 비늘무늬. 뒤꿈치는 물고기 꼬리 모양. 나름 디테일이 독보인다. 무게에 눌려 뒤축 꺼지긴 했지만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아이템이다. 왜냐. 맞춤 슬리퍼인  발을 완벽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착용감 만점이다.


야금야금 늘어 가던 몸무게는 급기야 아이를 한 명 다시 아야 하는 체중까지 되었다. 서성이며 집안일을 할 때, 내 무게가 발바닥에 오롯이 느껴졌다.  아무리 발바닥에 살이 차올랐다 해도 이 초록 슬리퍼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슬리퍼 덕분에 퐁신한 구름 위에 오른 기분으로 힘겨운 집안  일도 가벼이 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으로 된 슬리퍼가 있다.

갈색 바탕에 하얀색 잔 땡땡이 무늬. 이 슬리퍼는 언니가 선심 쓰듯 줬다. 신어보고 좋아서 묶음으로까지 구매했다고 .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기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간택된 슬리퍼다. 이 슬리퍼는 바닥에 쿠션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것을 신고서는 제대로 걷기보다는 바닥을 질질 끌게 된다. 그래도 이 슬리퍼가 좋은 이유는 털 슬리퍼나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있다 발에 땀이 라도 찰나 치면, 바로 이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 되기 때문이다. 슬리퍼계의 뽀송함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말고도 막 샤워하고 나와 발에 물기가 축축이 남아 있을 때. 발에 크림을 듬뿍 발라 다 흡수되지 못해 미끌거릴 때. 천 슬리퍼가 효자 노릇을 한다.      





우리 집 남자들은 한 개도 없는 슬리퍼를 나는 세 개나 고 있다. 혹여 내 슬리퍼를 한 개라도 슬쩍 신을까 봐 거실 현관 앞에는 절대 두지 않는다.  내 책상 아래, 세 개 모두 쪼르륵 모셔 두고 있다. 지금은 발가락 사이를 쭉 벌려 발판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글을 쓰고 있다. 슬리퍼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있는 셈이다. 책상 아래 쉬고 있는 슬리퍼들을 내려다보니 괜스레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홈슬리퍼 세 개나 신게 된 나란 여자.  


어느 하나 더 예뻐하지 않고

세심하게 골고루 신어줘야겠다.

















사진 출처@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 미운 가위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