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난 홈슬리퍼가 세 개나 있다.
몇 년 전 조기 폐경 진단을 받았고, 갱년기 증상이 내 발에도 내려앉았다. 발은 후끈 대다가도 금세 식어 차디찬 발이 되곤 했다. 한번 식은 발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변화무쌍 날씨가 내 두 발을 무대 삼아 열연을 했다. 이런 이유로 홈슬리퍼에 관심이 생겼고, 급기야 혼자서 슬리퍼 세 개 신는 여자가 되었다.
하나는 검은색 털 슬리퍼다.
속 안까지 양털이 빽빽한 어그 슬리퍼다. 남들은 한겨울 밖에서 신는 슬리퍼를 나는 집 안에서 신는다. 사계절 내내 가까이 두고 신는다. 그렇다고 매번 신지는 않는다. 새벽 기상하는 날, 추적추적 비 오는 날, 자정 넘어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날. 그럴 때만 한시적으로 신는다. 적절한 타이밍에 신어주지 않으면 얼음장 같은 차디찬 발을 경험하게 된다. 으악. 생각만 해도 시베리아 차디 찬 기운이 몰려온다.
다른 하나는 초록색 고무 슬리퍼다.
엄마가 일본 여행 선물로 사다 주셨다. 물고기 모양 슬리퍼로 눈동자가 데구루루 움직인다. 발등은 비늘무늬. 뒤꿈치는 물고기 꼬리 모양. 나름 디테일이 독보인다. 내 무게에 눌려 뒤축이 좀 꺼지긴 했지만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아이템이다. 왜냐. 맞춤 슬리퍼인양 내 발을 완벽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착용감 만점이다.
야금야금 늘어 가던 몸무게는 급기야 아이를 한 명 다시 낳아야 하는 체중까지 되었다. 서성이며 집안일을 할 때, 내 무게가 발바닥에 오롯이 느껴졌다. 아무리 발바닥에 살이 차올랐다 해도 이 초록 슬리퍼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이 슬리퍼 덕분에 퐁신한 구름 위에 오른 기분으로 힘겨운 집안 일도 가벼이 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으로 된 슬리퍼가 있다.
갈색 바탕에 하얀색 잔 땡땡이 무늬. 이 슬리퍼는 언니가 선심 쓰듯 줬다. 신어보고 좋아서 묶음으로까지 구매했다고 했다.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기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간택된 슬리퍼다. 이 슬리퍼는 바닥에 쿠션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것을 신고서는 제대로 걷기보다는 바닥을 질질 끌게 된다. 그래도 이 슬리퍼가 좋은 이유는 털 슬리퍼나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있다 발에 땀이 라도 찰나 치면, 바로 이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 되기 때문이다. 슬리퍼계의 뽀송함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말고도 막 샤워하고 나와 발에 물기가 축축이 남아 있을 때. 발에 크림을 듬뿍 발라 다 흡수되지 못해 미끌거릴 때. 천 슬리퍼가 효자 노릇을 한다.
우리 집 남자들은 한 개도 없는 슬리퍼를 나는 세 개나 신고 있다. 혹여 내 슬리퍼를 한 개라도 슬쩍 신을까 봐 거실 현관 앞에는 절대 두지 않는다. 내 책상 아래, 세 개 모두 쪼르륵 모셔 두고 있다. 지금은 발가락 사이를 쭉 벌려 발판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슬리퍼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있는 셈이다. 책상 아래 쉬고 있는 슬리퍼들을 내려다보니 괜스레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홈슬리퍼 세 개나 신게 된 나란 여자.
어느 하나 더 예뻐하지 않고
세심하게 골고루 신어줘야겠다.
사진 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