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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Aug 08. 2024

두 번의 암 수술

후유증과 분노, 후회, 그리고 아빠에 대한 체념

설 연휴기간이었다. 아빠가 덤덤하게 말했다.


"입 안에 딱딱한 게 있어서 병원에 갔는데, 암인 것 같다네."


나는 그 때 '구강암'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봤다. 후두암이라는 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입에도 암이 생길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아빠는 볼의 안쪽 면에 해당하는 부위에 암이 발병했다. 정확히는 협부암이라고 했다.


사실 그보다 2년쯤 전에 아빠는 건강검진 중 우연히 0기 상태의 위암이 발견되어 간단한 수술을 받은 바 있었다. 운이 좋았다. 빨리 발견되어 간단히 치료했고, 아빠는 크게 아프지 않고 보험금을 탔다며 기분이 좋았다.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0기가 아니었다. 처음 갔던 치과병원의 진단에 따르면 2-3기로 추정됐다. 급히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의학 공부와 병간호가 시작됐다.


우선 병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었고, 치과병원에서 수술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었다. 직간접적으로 해당 병원에서 경험했던 의료사고 사건으로 생긴 불신이 있었고, 아빠의 MRI 촬영 결과를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던 인턴 레지던트 의사들의 모습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교과서에서 보던 케이스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느낌으로 모여서 MRI 결과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과거 알고만 지내던 대학 동기도 있었는데, 치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갔다더니 그 자리에 있었다.


알아보니 구강암은 치과와 이비인후과가 모두 치료하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이비인후과에서도 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유명하다는 의사와 병원을 검색해 보고, 진료를 받았다. 치과병원을 포함해 총 네 곳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세 곳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고, 나머지 한 곳은 다른 방식을 말했다.


다른 방식이란 건 레이저를 활용해 병변과 그 주변만을 태우고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수술범위가 가장 작았다. 하지만 우리는 선뜻 그 방식을 선택할 수 없었다. 확률로 치면 25%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75%의 의료진은 다른 방법을 권했다. 살을 광범위하게 도려내고, 팔목 살을 이식해 넣는 방식이다. 팔목에는 허벅지에서 떼어낸 살을 다시 이식해야 해서 난이도도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수술이다.


결국 우리 가족은 다수결에 따랐다. 재발 위험을 생각하면, 최대한 보수적으로 수술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아빠의 뜻은 아니었다. 그저 누나와 내가 조사하고 고민하고 결정한 결과였다. 아빠는 그냥 아무 데서나 치료받아도 상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힘드니 마지막에 방문했던 레이저로 수술한다는 그 병원에 수술 예약까지 잡아 둔 상태였다.


그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병원에 입원하니 수술하려던 교수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다른 방법으로 수술하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참 이상한 의사도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결정한 대로 다른 병원에서 수술받기로 했다.


아빠는 13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수술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얼마나 무서웠을까도 싶다. 수술은 잘 됐다고 했지만 아빤 한 달이 넘게 병원에 있어야 했다. 처음엔 말도 할 수 없었고, 음식도 목에 뚫은 구멍으로 삽입해 드려야 했다. 후종인대골화증으로 목수술을 받으셨던 때와 달리 나는 결혼한 상태였고, 직장도 다니고 있었지만 틈나는 대로 아빠를 간병했다. 퇴근 후에 병원으로 출근했고, 아침이 오면 회사로 출근했다. 


이때도 아빠는 나아게 무척 고마워하셨다. 나는 '이제 술은 안 드시겠지. 조금 나아지겠지. 변하겠지'하고 생각했다. 구강암 역시 음주가 영향을 미친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은 그랬다. 그 힘들었던 수술과 회복 과정 때문에, 아빤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잔, 두잔 음주를 시작했다. 이유는 무료함과 스트레스, 분노였다. 아빠는 수술 후 직업을 잃었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얼굴에 방사선 치료를 했기 때문에 혀에 마비 증상이 나타났고, 쓴물이 나온다고 했다. 음식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몸도 보기 흉했다. 얼굴과 목이 수술로 비대칭적으로 변했고, 팔목에는 아이 주먹만한 이식 흉터가 남았다. 허벅지도 마찬가지다. 아빤 흉터를 가리기 위해 목수건을 두르곤 했다.


아빤 자주 신세한탄을 하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때 전화했던 그 교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가족들이 그에 대해 뭐라 말하면 화를 내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도 종종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라는 후회도 했다. 하지만 가족들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론 이렇게 예전 모습으로, 아니 그보다 더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 아빠에게 화가 나고, 체념하게 되었다. 이젠 어떤 계기가 있어도 아빠가 변할 거라는 기대감이 사라져 갔다.


아빠는 마치 은둔형 외톨이처럼 집에만 계셨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러 가서 술을 드시는 것 외에는, 집에서 TV를 보고, 주워온 물건이나 컴퓨터를 고치는 것을 소일거리 삼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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