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살 이유. 1화.
나는 회사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께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회사원의 아들이었다. 아니, 아버지는 정년퇴직하신 후에도 작은 회사의 고문으로 일하셨으니 아버지께서 몇 년 전 완전히 퇴직하시고 귀촌하시기 전까지 30대 후반까지도 회사원의 아들이었다.
회사원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안정감이다. 아버지께서 회사원으로 계신 이상 그 자녀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부침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아버지께서는 대기업군에 속하는 무역회사에서 일하셨고, 해외지사에서 일하셨다 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았다 보니 일반적인 회사원 부모를 둔 친구들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누리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사는 줄 알았다. 월급은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거나 과욕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여겼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내 주위에도 아버지가 회사원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해외에 나가 살면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내 주위에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친구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절대 회사원이 되지 않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난 절대 회사원이 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친 적이 있을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아버지께서 항상 일을 하느라 나와 시간을 거의 보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이 항상 '돈'을 강조하셨던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지만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당시의 마음과 생각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렇다.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니시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다니신 대기업은 해외지사를 둘 수 있는 규모의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우가 박한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해외 지사원들에 대한 지원도 충분하지는 않았는데 부모님은 동생과 내게 조금이라도 나은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외국인학교를 보내셨고, 그렇다 보니 아끼고 또 아끼는 게 습관이 되어 있으셨다. 어머니께서 '너희한테 쓰고 있는 돈 엄마가 다 기록해 놓고 있으니까 너희 크면 다 갚아야 된다'라고 하신 건 그만큼 경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장남에 부모님을 닮아 과도한 책임감을 가진 내겐 그런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압박이었다. 당시에는 아버지는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항상 바쁘신데 우리 집은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든지, 부모님이 더 좋은 회사에 다니는 애들은 회사에서 지원을 더 잘해줘서 그런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 같은데 우리 가족은 왜 이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런 상황과 환경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사춘기 때는 그렇게 회사원이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회사원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아는 사회생활은 회사생활뿐이었다.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경제활동은 회사원 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보니 회사원의 아들이었던 나는 사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외무고시를 볼까... 도 고민해 봤지만 나는 그런 시험 체질이 아님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고민만 하고 준비는 안 했다. 기자 준비를 했지만 '너 언론고시 재수 뒷바라지는 못해준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졸아서 결국 대기업도 같이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외교관도, 기자도 경제활동의 측면에 있어서는 결국 회사원이 아닌가? 회사원의 아들인 나는 이렇듯 회사원의 테두리 안에서 변주를 주려고는 했을지언정 그 틀을 벗어나진 못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아버지께서 다니셨던 회사보다 연봉과 복지가 훨씬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본인이 이루지 못한 회사원의 꿈이자 회사원으로 치면 별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대기업 임원이 되었으면 하셨다. 하지만 난 1년 만에 그만둬야겠단 생각을 했고, 2년 차에는 회사를 다니며 로스쿨 진학을 준비했고, 로스쿨 입시에 성공한 나는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2년 간의 회사생활을 뒤로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로스쿨에 간 게 아니라 '사회 디자인과 시스템'으로서 법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멍청해지는 것 같아서 평생 공부하면서도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일을 하고 싶어서 로스쿨에 진학했었다. 회사원의 아들로 곱게, 온실 속에서 자랐다 보니 2년 간 회사생활을 했어도 돈을 어떻게,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 생활의 끝에는 영업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는 결국 본인 사무실을 내는 '사업'을 하거나 회사로 들어가서 '회사원 변호사'가 되어야 한단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져 공부에 집중하기는커녕 방황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부모님이 갔던 길을 자녀가 따라가는 게 본인에게 편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세습해야 한단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좌충우돌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살다 보니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봐온 경제활동의 패턴에 익숙하단 것을 알게 됐다. 로스쿨에 가보니 부모님이 법률가인 친구들이 법은 물론이고 변호사 생활에도 잘 적응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부모님이 사업을 한 친구들은 회사생활보다는 사업에,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신 친구들은 종종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더라. 그 패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회사생활을 했을 때 아버지와 그나마 대화를 많이 했었다. 당시에 아버지께선 회사의 고위 관리자셨고, 나 같은 사회초년생 회사원들이 어떤 시행착오를 겪고 윗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보는 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내게 조언을 해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아버지의 조언들이 참견과 잔소리로 들렸다.
아버지께서 모르시는 방향으로 인생을 튼 후에야 옆에서 그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됐다. 평생 회사원이셨던 아버지는 내가 겪는 일과 상황을 알지 못하셨고, 그에 따라 내게 어떤 말도 해주실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무 말도 못 해주시니 누구도 내 옆에서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없더라. 내 주위 사람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는 건 꽤나 벅차고 힘들었다. 조언을 구할 곳도, 기댈 곳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나는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이 시리즈는 이러한 회사원의 아들이 프리랜서로 살아남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들을 넘어서 그런 경험의 결과물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지, 그리고 우리 부모님 세대와 오늘날을 사는 20-40대가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또 다른지에 대한 내 생각들을 이 시리즈 안에서 정리해보려 한다.
그런 시리즈의 제목이 '프리랜서로 살 이유'인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늙어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언젠가는 프리랜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80-90년대 회사에서 시작된다. 이는 그 시대를 이해해야 '어른'들의 잔소리와 참견들 중 어떤 것이 지금도 유효하고 어떤 것은 틀린 지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