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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12. 2024

프롤로그

법의 이유

학부에선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로스쿨에 진학했다. 변호사는 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힘들었지만, 법이 재미있긴 했기에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박사과정은 아직까진 내게 가장 즐겁게 공부한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는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법을 보는 내 시선 자체가 변호사시험에 적합하지 않았고, 나는 변호사처럼 법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학부시절에 정치외교학을 매우 재미있게 공부했고, 그 영향인지 나는 법을 어떻게, 왜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와 달리 변호사시험은 주어진 법에 대한 해석을 이해하고, 암기해야 했다. 거기다 암기가 약한 편이다 보니 결과가 좋지 않을 수밖에.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젠 다르다. 나답게, 내 식으로 공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답게 선택을 하다 보니 지금, 이 시점에 나는 내가 보람과 가치, 의미를 느끼고 일하는 과정에서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과 의미도 느끼는 일들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박사전공은 법을 해석하는 '법해석론'적인 성격이 아니라 어떤 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입법론'적 성격을 갖고 있고, 그렇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법과 관련된 일들을 나는 즐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건 로스쿨이나 법대가 아닌 전공학생들에게 법에 대해 가르치는 일인데, 이는 그런 경우 나는 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법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항상 놀라는 것 중 한 가지는 내 수업을 전공으로 들어야 하는 학생들도 법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하단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학문들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법은 특히나 법학자나 법률가들만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법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표현이 잘 와닿지 않기 때문에 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에 익숙하고, 법을 해석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법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명할 때 자신들끼리 사용하는 표현을, 그것도 많은 경우 해석론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패턴이 악순환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법이 어떻게, 왜 만들어져 있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모르고 현실에서 법과 관련된 이슈들을 접하고, 해석하면서 의견을 개진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심지어 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법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어설픈 것을 넘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내용으로 책을 쓰기까지 하는 것을 봤다. 물론, 법학자들 중에 대중들이 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쉬운 책을 쓰는 시도를 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책들도 많은 경우 법학자가 쓴 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법학박사이지만 다른 법학박사 선배님들과 결이 다른 편이다. 나는 무조건 깊게, 깊게, 내 관심사 속으로 빠지기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슈를 바라보려고 하는 편이고, 그러다 보니 내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여러 글들은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시작해서 법학적으로 이어진다.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을 때는 '이게 사회학 논문인가? 법학논문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법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긴 하지만 공부를 하기 전에도 다양한 경험을 했고, 지금도 법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도 하고 있다 보니 세상과 법을 보는 시선이 독특한 면이 있다. 


그렇다 보니 누구보다 법학적이지 않지만 법에 대해 설명하는 시리즈가 쓰고 싶어졌다. 왜 법이냐고? 우린 보통 때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법은 공기처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우리가 사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법이 지배하는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최대한 법학적이지 않고,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헌법, 민법과 형법을 다룰 예정이다. 가능하다면 행정법도 건드리면서. 이 법들을 다루는 가장 큰 이유는 헌법, 민법, 형법과 행정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으면 다른 법들은 그 법들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제목이 '법의 이유'인 것은 헌법, 민법과 헌법, 행정법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지를 다룰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헌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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