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필 Jul 08. 2021

12. 자립주거지원 일기 (12/15)

조력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오늘도 문을 여니 먼저 자신이 먹을 밥을 푸고 있는 A님. 워낙 일찍 일어나시고(새벽 5시에 일어나셔서 라면을 끓여드시고 출근하신다고!) 점심을 잘 안드시는지 허기가 지시나보다. 


자립지원주택에 살면서 실제로는 잘 맞지 않아(장애여부를 떠나 보통 맞는게 더 드문 일이니까) 아예 생활 패턴도 식사도 따로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두 분은 반대로 잘 맞으시고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는데, 이제 나와서 사는 생활이 익숙해지니 다 같이 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시는 듯하다. 


그래도 A님이 요리당번인 날이라 늦은 저녁을 먹는 B님을 위해 계란말이를 하기로 했다. A님은 계란매니아랄까. 항상 계란요리에 관심이 많으시다. 첫 번째 계란말이 시도 때는 내가 많이 도와드렸고 이번에는 되도록 혼자서 해보시도록 했는데 멋지게 잘 해내셔서 서로 잘 됐다고 약간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금요일은 바쁘다. 밀린 세탁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스팀청소기도 쓱쓱. B님은 어유 일하는 거 귀찮다고 투덜거리시는데, 내가 여기도 저기도 하시라고 잔소리를 하는 순간 절묘하게 내 발을 청소기로 쿡. 아이고~ 하면서 안절부절 하시는 모습을 보고 짐짓 나도 동네방네 소문내겠다고 장난을 쳤다. 시간이 갈 수록 나를 편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다행이다. 


다만 주거 코치의 역할의 범위에 대해서는 순간 순간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가끔 뭘 해야할지 나를 바라보시거나 무엇을 하면서 '선생님 ~ 할게요'라고 할 때면 어쩌면 차라리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있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헷갈린다. 


예산이 충분해서 이런 주거 코치들이 제도화가 되어 양성이 된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데이터들이 쌓이고 참조가 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아트링크와 같은 장애를 가진 예술가들과의 협동 작업에 있어서도 참여자들 사이에 이런 종류의 고민은 항상 있어왔던 것 같다. 조력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잘 작동하지 않을 때 무엇을 참고할 수 있나? 그리고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답이 없다는 점도 아마 비슷할 것 같다. 기록들을 공유하고 고민들을 나누고, 그런 네트워크들과 사려깊게 판단해줄 수 있는 경험자들, 코치를 위한 코치들의 존재도 필요하지 않을까, 어설프게 생각해본다. 


이제 다음주면 마지막 주다. 지금까지 텅텅비어 있던 알림판에  두 분이 드디어 먹고 싶은 요리들을 적었다. 제육볶음, 불고기, 등등... 역시 야채는 없군요?


---


자립주거지원 일기에 대해서 


서울시에서는 2022년까지 장애인 탈시설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설 장애인 뿐 아니라 가족이 있는 재가장애인 분들도 실제로는 가족이 있어도 독립거주를 위한 지원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요. 


지금 제가 참여하는 사업은 이런 재가장애인을 대상으로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수행하고 있는 주거지원실험사업입니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 분들은 한 달간 자립체험주택에서 가족, 본가와 떨어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주거코치로서 참여자 분들의 퇴근 후 생활을 함께 하며 식사 준비, 빨래 등 각종 생활 요령을 알려드리고 안전 문제를 확인하는 등의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매일, 그 다음주부터는 격일만 방문하면서 자립 생활에 익숙해지실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로 제안을 받아 이번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발달장애인 분들이 이용시설, 집을 벗어나 보다 폭 넓은 관계와 선택지 속에서 삶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은 언제나 제가 관심있는 일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생각보다 심심하고, 그런데 어딘가 시트콤스럽고 가끔은 뭉클하기도 한 순간들을 기록하고자 이 일기를 적어봅니다.  

이전 11화 11. 자립주거지원 일기 (11/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