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틀리면 빠꾸, 아빠 여기 있어'
“혼자서 외로우면, 언제든 내려와.”
“내려오고 싶으면 언제든.”
나는 금명이다. 아빠는 관식이고.
“아빠 안 보고 싶어? 나는 우리 딸 많이 보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보면 좋은데, 그치. 아무래도 주말에만 내려왔다가 올라가면 피곤하니까. 여유 있을 때 내려와.”
나는 사랑받으며 자랐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입에서 “사랑해”라는 직접적 표현은, 생일날 축하노래가 아니고서는 많이 듣지 못했지만, 난 분명 나를 향한 모든 눈빛과 행동이 사랑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감수성 정도는 타고났다. 내가 바라본 아빠는, 자신의 삶 전부를 온전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쳐온 사람이었다고 자부한다.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는 포부를 안고, 어린 나이에 당시 인기 있던 지역 농고 진학을 포기하고 홀로 대구로 상경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분투했고, '숟가락만 들고 오라.'는 한 문장이 회사 사보를 타고 지금의 엄마에게 닿았다. 그 말은 우리 가정의 시작이 되었고, 삶의 풍파에도 우리를 지켜온 담벼락은 아빠의 세월로 한 장 한 장 쌓여 그 홈마다 사랑이 메워졌다. 나는 아빠가 지키고자 했던 전부였고, 그의 삶이 표상된 존재였다. 나는 이를 상기시킬수록, 점점 더 아빠의 표창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늘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자식인 나는 그런 부모에게 늘 더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부족한 자신이 늘 미안할 뿐이다. 요즘 나는, 인간은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기억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실감하고 있다. 누군가를 보면 앞으로의 시간이 그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했던 시간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아빠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어릴 적 내 방은 현관 옆에 붙어 있었다. 밤이면 밀린 학습지를 풀다가도 9시 20분쯤이면 방문에 귀를 대고 조용히 서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계단 한 칸 한 칸 내려 밟는 발걸음 소리에 걸음의 리듬을 유심히 느끼며 그날 아빠가 짊어졌을 가장의 무게를 가늠하곤 했다. 매일 아침 7시, 현관문을 나서는 아빠에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힘없이 내뱉은 “잘 다녀와.”라는 딸의 인사를 아빠는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주말이면 언제나 가족과 함께했다. 그 덕에 나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품을 이유가 없었다. 아빠와의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괜히 서운해 하시진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아니, 어쩌면 아빠가 서운해하길 바라는 나의 작은 기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서 특별히 아주 멀리 여행을 간 적은 많지 않았다. 다만, 매번 돌아오는 주말마다 우린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의 내가 거창한 해외여행보다 가까운 동네 산책을 더 좋아하는 것도 그 영향일 것이다. 좋은 날이면 기념하기 위해, 속상한 날이면 위로받기 위해 나는 늘 아빠의 퇴근을 기다렸다. 하루를 마치고 다 함께 마시는 ‘커피타임’이라는 우리 집만의 문화가 있었는데, 그 시간만큼은 하루 동안 쌓인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 도란했던 정겨운 소란이 나는 너무도 좋았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어쩌면 커피로 입혀졌던 그 시간을 그리워해서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의 취향, 내가 편안해하는 정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의 결들,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모두 아빠와의 그 추억 속에서 빚어진 것들이다. 우리 집은 물질적으로 부유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이 작다’는 사실은 오히려 오순도순 가득 차서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집은 언제나 풍족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회사에 출근하셨지만 함께 하지 못한 그 시간의 공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빠는 가족을 밀도 있게 사랑해 주셨다.
아빠는 늘 나를 기다렸다. 단 한 번도 내게 등을 돌린 적이 없었다. 어리고 철없을 시절, 괜히 심술이 나 "아빠 싫어!"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에도, 고등학생이 되어 독서실에서 자정이 넘어 귀가했을 때에도, 병원 근무 후 까마득한 퇴근길에도, 집을 벗어나 파주로, 서울로 멀리 혼자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아빠는 늘 나를 기다렸다.
토라진 내 마음이 열리기를 바라며 내 방문 앞에서 기다렸고, 독서실 앞에서, 친구들과 흩어지는 그 길목에서, 근무를 마친 내 퉁퉁 부운 다리로 병원 밖을 나서면 아침이든 새벽이든, 내가 가장 덜 걸어도 되는 자리에 아빠는 늘 서 있었다. 지금도, 아빠는 나를 기다린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아빠가 매일 잘지내고 있는지 걱정인가보다, 잘 지낸다 해도 또 걱정되나봐. 나중에 아빠가 차타고 올라갈까라고 물어보면 지연이는 아빠가 힘들고 피곤할까봐 ‘나중에 내가 내려갈게’라고 말하지만, 그냥 ‘아빠, 올라와줘.’라고 그렇게 투정부려. 아빠는 올라가고 싶어도, 괜히 주말에 피곤하게 만들까봐 조심스러운 거야.” 사실 나는, 아빠의 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다. 아빠의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면 교만일지 모르지만, 그 말의 무게를, 그 목소리에 묻어 있던 물기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연락을 한다. 아침이면, 가족 카톡방에 아빠가 하트를 붙여 “오늘 하루도 파이팅!”을 외치며 승리의 깃발을 먼저 흔들어준다. 그리고 우리 부녀는 전화를 한다. 매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할 게 많은지 한번 시작한 통화는 1시간을 훌쩍 넘겨 거의 2시간 가까이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피곤하지? 전화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로 통화를 마친다.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밥은 잘 먹었는지’, ‘오늘은 별일 없었는지’, ‘잘 먹고 잘 자고, 안 아픈 게 최고다’ 그리고 ‘고맙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는 말. 그 말들 사이에는 늘 흐릿하게 퍼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엉켜 함께 붙어있다.
내가 종종 넘어지고, 때로는 좌절하고 무너지고, 간혹 주위로부터 매정하게 외면당했을 때도 다시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었던 건, 아마 아빠의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화살이 나를 향할 때에도 숨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벼랑 끝에서도 추락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 혼란스러운 갈림길에서도 내 한 발을 당당히 내디딜 수 있었던 건, 나는 나를 지켜줄 든든한 방패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 벼랑 아래에도 나를 안아줄 성긴 그물망이 쳐져 있다는 것, 모든 갈림길도 결국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게 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함께 걸어준,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빠는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나를 맞아줄 아빠가 있다.
“아빠가 보러갈까? 서울 길 잘 되어 있어서 청주에서 한번 쉬면 얼마 안 걸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