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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색가방 Jul 28. 2020

프로의 세계라는 건

- 신인 시나리오 작가 집필 일기, 네 번째 질문 -

바다를 향한 한 발자국

작년 5월에 시작한 계약 이후로 제일 오랜 시간 동안 차지한 것이 바로 ‘기획’ 단계다. 어떤 아이템으로 진행할지, 그 아이템을 어떤 장르로, 어떤 로그 라인으로 표현할지, 그것만 거의 8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4개월은 아이템 정하기, 4개월은 정한 아이템을 가지고 어떤 영화를 만들지, 8개월이란 시간 동안은 정말 착즙의 고통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제대로 써왔던 글들에서 나는 늘 소재들이 머릿속에 있었다기보다 어느 순간 확 떠올라서 확 완성해버리는... 그런 식으로 작업해왔다.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아이템 구상이나, 기획안 구성, 트리트먼트까지의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생각의 작은 심지에 불이 붙으면 그걸로 끝장을 보는 편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내 생애 첫 콩트 소설 <누가 이곳을 아름답다 했는가> 역시 그 문장으로 시작했고, 그 문장이 그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그것이 내 작업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기존에 준비해둔 아이템이 참 없었다. 특히 ‘상. 업. 장. 편. 영. 화’라는 기준에서 말이다. 어떤 소재는 단막극, 어떤 소재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더 잘 맞는, 어떤 소재는 2막짜리 연극에 더 어울리는, 또 어떤 소재는 중장편 소설에 적합한, 그렇게 아이템들을 계속 짜낸듯한 시간이 4개월이었다.


그렇게 피디님과의 4개월 동안의 아이템 회의 이후, 정해진 건 제일 초반에 피디님에 보여드렸던 아이템이었다. 조금 허탈하기도 했지만, 제일 불안하던 아이템이라 걱정이 앞섰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쓰기 전에 이 소재를 가지고 쓰려고 했지만 어려울 것 같아 포기했던 소재이기도 했다.)   

  

책장에는 나만의 규칙이 필요하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아이템이었기에, 기획안과 트리트먼트를 쓰기 이전에 해야 할 단계가 추가되었다.

바로, ‘자료 조사’     


휴학생이었던 나에게 가장 신뢰성 높은 자료 조사 방법은 ‘논문’이었다. 해당 인물 관련 논문이란 논문은 다 읽은 것 같다. 더불어 시대적으로 참고해야 할 것에 신문이 있어서 근대 한글로 된 텍스트를 읽었어야 했다. 이때 내 전공 중 ‘국문학’이 그렇게 도움될 거라 생각 못 했다. 아무래도 전공 특성상, 한문이나 중세 국어부터 근대 한글까지 다양한 텍스트를 읽어야 했었기에 자료 조사가 조금은 수월했다. (아무래도 그 당시 대학생 신분이었던 것이 큰 도움이었다. 학교가 논문 이용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논문은 내가 읽었어야 했던 수많은 책을 절반으로 줄여줬다.)


그렇지만, 그 인물을 파고 팔수록, 나는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참으로, 매력적이었으나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템으로 정해졌을 때, 제일 걱정되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걱정과 우려에 맞게 뻥 하고 터져 주었다. 이따금 그분께 묻는다. 내 삶에 왜 이렇게 찾아오셨냐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 과정에서 피디님은 한 마디를 하셨다.     


“300만의 관객들이 영화관에 오게 해야 해요.”


아이템 선정 이후, 기획안 수준에서도 엄청 많이 뜯어고쳤다. 피디님은 이 기획안에 못 해도 60억이 들 텐데,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300만은 들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아오고 좋아할 영화여야 한다고, 다시 ‘상. 업. 장. 편. 영. 화’라는 정의를 읊어주셨다.


나도 그 말엔 공감했다. 사실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만드는 입장에서 그 누가 관객들은 몰라줘도 돼, 나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할까. 작가에게 글은 자신의 것이지만, 작품이 되기 위해선 읽어주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예술이라도 즐겨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예술 속 메시지를 전달받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외로운 예술일까.


그렇다고 관객의 입맛에 맞추자는 것은 아니다. 확실한 건, 내가 하고자 하는 것과 관객이 원하는 것이 딱 맞는 그 지점, 그 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지점이 맞는다면 얼마나 큰 카타르시스가 찾아올지 기대가 될 따름이다. 언젠가는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많은 기획안들 중에 제일 하고 싶던 기획안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다시금 그 인물과 만난다면 더 성장한 내가 더 잘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늘 108배를 하게 되는데, 고민과 소원을 없애거나 이뤄달라 기원하지 않는다. 단지 이겨낼 힘과 이룰 기회를 기원한다.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게.

오늘의 질문

Q. 여러분들의 영감은 어디서 오나요?     

A. 우선 저의 답) 찾아다닙니다. 매번 ‘이렇게 합니다’라는 확실한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새로운 직업군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던지는 경우도 있고, 메시지를 정해두고 그에 적합한 상황을 꾸리는 경우도 있고, 제가 겪었던 일들 중에서 찾기도 합니다. 근데 확실한 것은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 오지 않더라고요. 늘 제가 찾아다녀야 하나쯤 찾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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