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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 Aug 31. 2022

인생 더럽(The love) 포인트를 찾아, OOO!

오늘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힘. 함께 덜어내면 숨도 쉬어진다.


우리 이제 그만 연락하자.

제일 좋아하던 20년 지기 친구에게 열 글자로 된- 절교 선언 연락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손절'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관계를 종료할 때, '손절'이라고들 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절교’라는 단어는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거였지, 친구 간 의도적으로 헤어지는 일은 상상도 못 했다. '절교'라는 단어가 20대의 어른이 된 나에게 있을 줄이야. 그것도 내가 제일 의지하고 좋아하던 절친에게-


10여 년 전, 그 문자를 받은 후,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우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난 너와 헤어질 수 없다며,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친구에게 물으며 질척거렸다.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해오던 친구였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였다. 친구는 내 눈빛만 보고는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친구는 내가 오랜 기간 나의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 않아 서운했다고 털어놓았다. 오랜 시간을 만나왔지만 속내를 꺼내놓질 않으니 내가 우리 우정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를 해왔다고 했다.

실은 그게 아닌데... 표현에 서툴렀고, 근원적으로는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방법을 몰랐다. 속내를 꺼내 놓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 타인에게 고민을 꺼내어 공유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민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라 생각해왔기에 혼자 끙끙 앓으며, 끌어안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왔다.


20대 이전의 나는 말이다.


(그날, 친구 앞에서 펑펑 울며, 나의 부족한 이 부분을 털어놓았다. 왜 크고 작은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했는지, 그동안 남들에게 말 못 했던 인생사까지.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타인에게 쏟아내 본 첫 번째 날로 기억된다. 결론적으로 그 친구와 그날, 서로에 대한 진심을 다시 확인했고, 지금까지 연락하며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20대 중반이 되니 내가 표현을 잘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새침떼기'다, 혹은 '우리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생기기 시작했다. 내 마음과 다르게 그 사람에 대한 내 온기가 상대에게 닿지 않으니 관계의 서먹함이 어색함을 만들기도 했다.


그 부작용은 내 안에서 크게 터졌다. 감당할 수 없을 상처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때, 그동안 누적된 상처 더미들을 쏟아낼 곳이 없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중간중간 고민들을 밖으로 덜어낼 수 있었더라면.. 기대고 의지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짐들을 조금씩 털어놨더라면 괜찮았을까?


속내를 털어놓는 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리숙한 나란 존재는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한없이 흔들렸다. 일어날 방법을 모르고 마구 울었고, 마구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적당히 살던 끝에 인생의 흔들림을 잡아줄 OOO을 만났다.



태기 10년, 그 끝에서 만난 친구들.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쓰는 것을 싫어했고,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글짓기 대회 원고 제출을 위해 원고지 위에서 왼팔을 베고 누워 ‘쓰기 싫다, 쓰기 싫다. 토할 것 같이 쓰기 싫다.’라고 되뇌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연필로 글을 썼다. 반면, 밤새 쓰기 싫다며 꾹꾹 눌러쓴 원고들은 크고 작은 대회 수상작이 되어 상장들로 보상을 받았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되어서도 쓰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그래서 쓰면서도 쓰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나는 지금 쓰지 않는 것이 아니야. 글태기를 겪는 것일. 뿐.


태기가 10년이면, 그건 사실. 안! 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저로 책은 써왔지만 '내'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을 용기는 없었던 지난 10년. 그럼에도 '글쓰기'를 늘 갈망해오던 지난 10년. 얼마 전, 그 10년의 머뭇거림을 끝내게 해 준 운명 같은 글쓰기 친구들을 만났다. 일상 속 빛나는(Light) 순간을 바라보고, 가볍게 글을 쓰며(Writing), 함께 성장하는 친구들(Crew)이라는 라라크루. 삶이 지치고 무거웠던 시기에 ‘여기에서라면 잠깐이라도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싶어 매일의 일상을 가볍게 글로 나누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사는 삶을 지향하던 내가 한순간에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늘어졌으니, '글이 다시 내게 힘을 주는 기점이 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기대감을 가져봤다.



삶태기, 인생의 더럽(The love) 포인트를 찾아!

사실 글태기가 문제가 아니라 삶태기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빠져나오고 싶지만 끝없이 어둠으로 치닫는 생각의 꼬리들, 아무리 괜찮다고 다독이며 애를 써봐도 불쑥불쑥 잠겨버리는 슬픔에 속수무책이던 시간들. 언제까지 그 어둠 속에 내 삶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일어나 보기로 했다. 나를 다독이기 위해 마음을 추스르고 제일 좋아하던 일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일, 내가 나를 아껴줄 수 있는 일에 몰두해보기로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슴 뛰게 하는 OOO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것이 바로 삶테기에서 삶을 구출시켜 줄 인생의 더럽-(The love) 포인트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그 OOO. 더럽- The love 포인트가 ‘책’이었고. ‘글’이었다.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새벽을 괴로워할 바에야 좋아하는 글로, 책으로 시간을 채워보기로 했다. 잠에서 뒤척이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지는 날에는 글을 썼다. 잠의 절대적인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눈 떠지는 대로 일어났으며, 졸린 만큼만 자고 일어나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채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밤늦은 새벽, 이른 새벽- 잠에 못 드는 날이면 무조건 책을 읽거나 타자를 쳤다. 때로 일어나기가 싫은 날에는 누워서 이불속에서라도 핸드폰으로 글을 썼다.


혹자는 ‘그렇게 마음이 힘들면 잠이라도 더 자는 게 나은 것 아냐?’, ‘힘들다면서 글은 어떻게 써?’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새벽 조깅을 나가고, 누군가는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누군가는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이 ‘글쓰기’였다.


특히 일상 중의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찾아 글을 써보자는 라라크루 모임의 취지를 생각하며 글을 쓰려다 보니 의도적으로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좋은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상을 살고자 노력했다. 불가피하게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5일장에 떡볶이를 사러 가서도 ‘행복’한 순간을 문장으로 뽑아내기 위한 ‘좋은 생각하기, 행복한 순간 포착하기’라는 의식적 노력을 해야만 했고, ‘다음에는 떡꼬치 사 먹으러 와서 아이와 함께했던 순간들에 대해 글을 써봐야지.’라는 새로운 목표도 만들곤 했다. 퍽퍽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그 반짝임을 글로 옮겨내다 보니 내가 반짝이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생각들로 채워지는 나를 마주하는 기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이 나쁘지 않았다.


인생의 더럽(the love) 포인트로 인해  삶태기에서 구출되고 있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https://brunch.co.kr/@pinkkongju/64



https://brunch.co.kr/@pinkkongju/82




가볍게 덜어내는 삶은 더럽-(The love) 

입시, 취업, 결혼과 같은 삶의 중대한 목표가 어느 정도 도달되고 나면, 무기력이 언제든 우리 삶을 잡아먹을 기회를 노린다. 그것을 우리는 '권태기'라고 부른다. 그 권태기에 삶이 잡아 먹히면 작은 충격에도 무기력해지고,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뒷걸음질 친다. 나의 경우에는 그 '삶의 권태기=삶태기'를 ‘글쓰기’라는 목표를 통해 극복해보려 했다. 믹스커피를 타 먹다가도 순간, 반짝-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며 ‘나’를 돌보는 시간들을 늘려갔다.




https://brunch.co.kr/@pinkkongju/143




‘글쓰기’로 맞닿은 삶의 결이 같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글을 쓰고, 서로를 격려하는 일상을 공유한 후로 삶은 다시 활력도, 웃음도 찾아가기 시작했다. 때로 힘든 하루도, 즐거운 일상도 ‘글’로 공유하며 그 글에서 유쾌함을 문장으로 건져내는 서로를 응원했다.


삶을 글로 옮겨 쓰는 과정은 다른 말로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과정'다. 삶을 글로 쓰면 마음의 짐들이 덜어내 진다. 마음속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방법에 서투르던 내가 글을 통해 조금씩 '나를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해 갔고, 나의 고민들을 세상에 꺼내놓으며 무겁던 짐들을 덜어냈다. 혼자였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함께 쓰고, 함께 덜어내고, 함께 나누니 한결 가벼워졌다. 함께한다는 생각에 지속적으로 내 삶을 밝은 곳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도 생겼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그 힘이 셌다.



덜어내는 삶을 통해 얻은 것

1. 흔들리던 일상으로부터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받는다.

2. 마음을 스스로 다잡을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3. 삶태기에 빠졌을 때 용수철 같은 회복력을 얻을 수 있다.

4.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내면을 성장시킬 의욕을 찾을 수 있다.

5. ‘책 읽기’를 통해 잃어버린 길을 찾으려는 삶의 더듬이를 더욱 견고하게 키울 수 있다.

6. '글쓰기'를 통해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내면을 굳힐 수 있다.



힘을 키우고, 실력을 갖춰.


 '왜 오수제인가'라는 드라마의 대사를 반대로 해석하면 '힘을 덜어내고, 꾸준함으로 내면을 채워.'라고 해석된다. 마음을 덜어내고 꾸준히 마음을 채우도록 시도하면 일상 속 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쌓이는 글만큼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무게를 덜어내며, 불필요한 생각들을 가지치기하다 보면 삶의 다른 이면, 반짝이는 순간이 새롭게 보인다. 의도적으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흔들리는 일상을 잡아준다.


일상 중의 반짝이는 조약돌을 찾다 보면 내가 조약돌이 나인지, 내가 조약돌인지- 모르게 하루 중의 일부라도 반짝이는 순간들이 생긴다. 어쩌면 내가 찾던 것은 조약돌이 아니라 '아직도 반짝일 여지가 있다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다 보면 일상이 반짝인다. 일부러라도 일상을 반짝이게 만들어보려 노력했고, 힘든 상황도 조금은 가볍게 생각해낼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매일 한 가지 일을 100일 이상 지속하며 따라온 근성, 엉덩이 힘(글력-)은 덤이다.


한결 가벼워진 라이트 라이프(Light life). 가볍게 살고, 삶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시도는 오늘의 삶을 사랑하게 만들어준다. 덜어내며 사는 삶은 사랑이다. 더럽-(The love)




[브런치를 시작한 지 3개월 차가 되며 썼던 글에 대댓글로 썼던 글. 글쓰기로 건강한 생각을 얻었다.]



<반창고 문장>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며, 일상을 반짝-이는 시각으로 즐기는 더럽-(The love) 포인트, 자신만의 OOO를 찾는 라이트 라이프(Light life)를 추구하다 보면 오늘의 내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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