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모 Jan 01. 2022

[단편] 목소리

그만의 파동 (스무 살 무렵 썼던 글)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사람들을 향한 나의 애절한 눈빛에는 관계없이 그들은 너무나 큰 소리로 떠들면서 스쳐간다. 나는 그들의 태연한 소리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그저, 한 번 더 찡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히 내 눈동자는 책을 읽고 있는데 집중할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 과자를 먹는 소리 모든 것이 거슬리다. 결국 난 또 귀를 틀어막는다. 아직은 낮이라 한적한가 싶었더니 점점 더 사람이 많아진다. 역시 공원은 나에게 무리다.


어려서부터 나는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다. 보통 이렇게 병적으로 민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단지 처음부터 엄마가 설거지 하는 소리, 티비에서 나오는 노래소리, 동생이 우는 소리, 모든게 소음이었다. 놀이터에 나가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도 싫었고 남들 다 좋아하는 티비만화를 보는 것도 싫었다. 티비를 볼 때면 소리를 전부 줄이고 영상만 봤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건 집 전화 벨소리였다. 적막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있노라면 따르릉 거리며 적막을 깨트려버리는 전화기는 때로 사악해보였다.


때로는 견딜 수가 없어 도망쳤다.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소음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곳은 바로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욕조에 우두커니 앉아서 수도꼭지 물이 규칙적으로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이 곳 같으면 숨통 좀 트이려나 싶어 안심이 됐다.


소리를 싫어하는 나에게 대화는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나긋나긋이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어느정도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하이톤의 일명 '떽떽'거리는 목소리를 가진 여자아이라거나, 쓸 데 없이 목소리만 커서 깐죽 거리는 남자아이와 잠시라도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가령, 높은 소리를 한 톤 내려준다거나, 너무 큰 음량을 줄여준다거나, 쓸 데 없는 이야기들이라면 음소거 버튼을 누른다거나.


그런 상상을 하며 그들의 말하는 입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들의 목소리는 차단된채 뻐끔뻐끔 거리는 입만 볼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은 나는 단연히,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소리가 차단된 곳이니까.
세상이 온통 독서실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만히 앉아있으려면 조심스런 발소리와 책장 넘어가는 소리. 평화로웠다. 이 곳이야 말로 깨끗한 곳이다. 소음이 있는 모든 곳은 지저분하다. 나는 모든 소리를 경멸한..


스르륵,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옆에 앉아도 될까요?"라며 뻐끔거렸다.


사실 조금은 놀랐다. 이 조용한 곳에서 누군가와 소통을 하기는 처음이다. 내가 방심했다. 조용하게 보이는 남자는 어깨에 매고 있던 검은색 가방을 풀렀다. 가방이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데 단정해 보인다. 내가 자꾸 그를 의식하며 바라보니까 이번엔 그가 날 의식했다. 나는 또 놀라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정확히 도서관 같은 자리에서 그를 열아홉 번 보았다. 물론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자리에 앉았으니까, 나는 조용한 그 곳이 좋았고 조용한 그가 좋았다. 단정한 그의 외모 또한 고요해 보였다. 그는 향기마저 차분했다. 그리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사진에 관련된 서적을 보는 듯 했다. 때로는 카메라 조작법 같은 설명서를 보기로 했고 때로는 로버트 카파 같은 유명한 사진가의 사진집을 보는 것 같았다. 어느날인가 그는 책장을 넘기지 않은 채 같은 페이지를 거의 10분째 보고 있었다.


'어떤 사진을 보고 있는거지?' 궁금해서 나는 다른 책을 찾는 척하며 그가 보고 있는 사진을 훔쳐보았다. 그 사진은 그냥 황폐한 전쟁터 사진이었다. 약간은 시시했지만 그가 오래 보던 사진이니까 왠지 아름다워 보였다.


그 이후 나는 장롱 안에 묵혀두었던 오래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20년 된 카메라라고 하니까 이건 딱 내 나이만큼이다. 나는 사진기가 좋아졌다. 사진기도 아무런 말없이 무언가를 담고 있으니까. 

그를 정확히 스물 다섯번째 지켜보던 날, (무려 세 달이나 걸렸다. 그는 매일같이 도서관에 오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그와 대화가 나누고 싶어졌다. 나는 그에게 쪽지를 썼다. 그럴듯한 이유로 그를 불러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듯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고민끝에 쓴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펴는 그의 손이 섬세하다.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을때 내가 놀랐던 것처럼, 그도 나를 보며 조금은 놀라는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 Connected peop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