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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Jan 12. 2024

Prologue

꽃이 좋아요.

꽃을 자주 선물 받은 기억이 나네요.

성인의 날 남자친구에게 처음 받았던 꽃다발이요.

그 꽃다발을 받은 날, 참 많이 두근두근하며 설렜던 마음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은은하게 남아 있어요.

첫사랑의 기억과 꽃들이 오버랩되며 그날 이후로 꽃이 참 좋아졌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구나, 계속 계속 오래오래 받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남자친구는 50일, 100일, 200일, 300일... 빠지지 않고 기념일에는 꽃을 선물해 주었어요.

꽃과 함께한 그때 저의 사진들을 보면 눈도 웃고 입도 환하게 웃고 있어요. 어린 마음에 남자친구 앞에서는 좀 도도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나 봐요. 그냥 배시시 웃는 바보 같네요.


그 남자친구는 이후에 저와 결혼을 했고 이제는 남편이 되었지요. 저의 남편이 된 그는 더 이상 제게 꽃을 선물해 주지 않아요. 이유는 연애할 때 꽃을 선물해 주면 제 반응이 시큰둥했다는 거예요. 분명 사진에는 웃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속으로는 기뻤지만 남자친구 앞에서는 '난 이런 꽃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여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괜히 시크한 척 연기를 했던 날들이 생각이 났어요.


저 어릴 때 이중인격이었나 봐요.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한창 어리고 예쁠 시기이니 온갖 잘난 척은 다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하니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다니요. 착한 남자친구가 저에게 질려서 도망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에요. 하지만 제대로 공주병이었던 시절도 이젠 다 추억이네요.


아무튼 남편은 꽃 선물에 대한 기억이 별로였는지 저에게 다른 것들은 선물해 준다 해도 꽃은 여태껏 선물해주지 않아요. 저는 꽃이 좋은데 남편에게는 받을 수 없게 되었어요. 자업자득이죠 뭐.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걸어서 5분 거리에 작은 꽃집이 오픈을 했어요. 동네 엄마들은 우르르 꽃집에 몰려 가 오랜만에 꽃 좀 사서 집에다 꽂아야겠다며 신나 했어요. 저도 엄마들이 모두 물러가고 가게가 고요한 시간에 살그머니 찾아가 제가 좋아하는 핑크색 장미 몇 송이를 골랐어요. 플로리스트 언니는 센스 있게 꽃들을 포장해 주셨고 전 장미의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총총총 집으로 돌아갔어요.


집에 돌아가 결혼식 때 선물 받았던 크리스털 꽃병에 장미들을 가지런히 꽂아놓았죠. 1층에 서향이라 해가 항상 그리운, 컴컴하던 우리 집 거실이 몇 송이의 꽃들로 인해서 이렇게 화사해질 수 있다니 많이 놀라웠어요. 제 마음의 불빛이 반짝인 건지 우리 집이 빛나는 건지 모를 정도로 행복했어요.


꽃을 2주간 열심히 돌보았어요. 마이너스인 제 손은 식물을 키우는 족족 다 힘없이 쓰러져 저세상으로 가곤 했는데 핑크 장미들은 어여쁘기만 한 게 아니라 제 손에서도 참 곱게 잘 버텨 주었어요. 그래서 더더 기특하고 신기했죠.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다시 동네 꽃집에 들러 노란 장미를 구입했고, 이번에도 우리 집은 꽃들로 인해 1.5배 더 생기 있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2주 간격으로 꽃을 사러 가는 게 저에겐 소소한 기쁨이었고 그날도 여느 때처럼 꽃을 사기 위해 꽃집을 방문했지요. 그런데 세상에나, 가게 문이 굳게 닫혀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사랑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메모가 문 앞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어요. 친절하고 상냥했던 플로리스트 언니는 왜 2주 전에 저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걸까요? 다음 방문에 실망할 저에게 미안했던 마음이었을까요? 이제 꽃 가꾸기가 너무 좋아졌는데 이렇게 떠나가면 전 어떡하죠?


낙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인터넷에서 꽃을 배달해 준다는 가게를 찾게 되었어요. 정기적으로 꽃을 택배로 보내준다는 소식은 집 앞도 잘 나가지 않는 저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서둘러 정기배송을 신청했고, 그렇게 2018년부터 전 '꽃을 배달받는 여자'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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