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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Mar 08. 2024

분홍색 수국을 닮은 우리 반 여자아이

부러운 너

경열이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많이 동경하고 부러워했같은 반 친구예요.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살짝 큰 키,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숏컷을 한, 조용하지만 가끔씩 옅은 미소를 짓고 앉는 자세가 참 바른 단정한 아이였죠. 학교에서는 매년 경필 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글씨를 예쁘게 잘 쓰는 학생들은 상장을 주고 수상작은 게시판에도 붙여놓아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답니다. 예쁘게 글씨 쓰는 일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저는 우수상을 탔고 경열이는 최우수상을 탔었어요. 왜 내가 우수상일까 싶어 교실 밖 게시판에 붙은 당선작들을 확인하다 맨 위에 붙은 경열이의 글씨를 보았어요. 그런데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깔끔하게 써 내려간 궁서체는 어른들도 놀라워할 만한 수준이었거든요. 어쩜 글씨를 본인 얼굴처럼 저리도 정갈하게 쓸 수 있는 건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교실로 돌아가서는 경열이의 옆모습을 살짝 보았어요. 부러움에 요동치는 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열이는 본인 자리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를 꺼내 조용히 읽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마음에 최우수상을 탄 일을 주변에 떠벌릴 만도 한데 점잖은 모습이 참 선비 같아 보였답니다. 어느 날은 경열이의 글씨를 똑같이 따라 하고 싶어 교과서를 빌려서는 글씨체를 그대로 흉내 내어 제 책에 옮겨 적은 적도 있었어요. 심지어 그 친구가 연필을 잡는 모습까지도 흘끔거리며 똑같이 따라 했답니다. 워너비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은 불과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또래의 친구를 보고도 충분히 불어올 수 있는 거였나봐요.


반장선거가 있던 날. 제 인생 통틀어 가장 공부를 못하고 존재감 없이 살던 4학년때는 양심상 반 친구들에게 절 반장으로 뽑아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 선거에는 나가지 않았어요. 대신 경열이가 꼭 반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제가 보기에 경열이 빼고는 우리 반에 반장감이 한 명도 없는데 혹시라도 부반장이 되면 어쩌나 걱정을 한 트럭은 했답니다. 자신 있게 반장선거에도 못 나가는 제 걱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 친구가 반장이 되냐 안되냐가 저에겐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던 걸 보면 그 친구를 참 많이 응원하고 좋아했나 봅니다. 아무튼 바람대로 경열이가 여유 있는 득표수로 반장이 되었고 저는 속으로 너무 기뻐 팔짝팔짝 뛰었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반장으로 키워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이번에도 경열이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더니 다른 친구들에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그동안 제가 본 표정 중 가장 환하고 밝은 모습이었어요. 저도 쑥스러웠지만 경열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축하한다고 말하니 누구에게나 다정한 그 아이는 '고마워 벨라야'라며 제 이름을 불러줬어요. 친구끼리 고맙다며 제 이름을 불러줬을 뿐인데 그게 왜 이리도 감격스럽고 영광이던지 지금 생각하니 그런 제가 너무 짠하고도 또 재밌게 생각돼요.


골골한 저와는 다르게 경열이는 운동도 참 잘했답니다. 피구이면 피구, 발야구면 발야구, 제자리멀리뛰기면 제자리멀리뛰기 등 세상에나 뭐든지 다 잘했어요. 피구 할 때 공을 옆구리에 끼고 불꽃샷을 쏘면 대편 아이들이 우르르 맞아서 탈락했어요. 저는 요리조리 공은 잘 피해 다녀 게임의 끝까지 남는 편이었는데 경열이와 같은 편이 되면 그렇게라도 살아남아 승리에 도움을 주고 었죠. 또 그 아이는 허벅지에 스프링을 장착하고 태어난 건지 멀리뛰기도 선생님께서 줄자로 표시해 놓으신 선 훨씬 위로 훌쩍 뛰어넘어서 반 친구들의 탄성을 자아냈어요. 저는 선을 넘을 때도 못 넘을 때도 있었건만 항상 기준선을 가뿐히 넘어 날아가는 그 아이는 체육도 잘하는 만능이었던 거예요. 또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경열이에게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하실 때면 특유의 침착하고 또렷한 발음, 일정한 호흡으로 버벅거림 없이 한 페이지를 야무지게 읽어 내려갔어요. 왜 더듬거리지도 않고 책까지 잘 읽는 걸까 신기했어요. 그래서 제 차례가 되면 저도 이를 악물고 틀리지 않고 잘 읽어보려고 애를 썼답니다. 선생님께서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잘 읽었다칭찬이라도 해주시는 날엔 의기양양해진 기분으로 경열이를 쓰윽 쳐다보면 절 보며 웃어주어 참 고맙고 힘이 됐어요.


'흔히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그 반대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에 깊은 성장통을 겪으며 경열이에게 느꼈던 엄청난 동경과 부러운 감정들이 저에게는 큰 발전을 주는 원동력이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5학년이 되면서 저는 학급 부반장이 되었고, 전 과목에서 만점을 받아 반 친구들과 선생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1년 전 쭈글거렸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제가 되어 있었어요. 김난도 작가님의 말씀처럼 저는 친구를 부러워했기 때문에 지난날의 저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친구를 닮아 더 예쁜 분홍색 수국

수국을 배달받던 꽃을 보며 문득 경열이 생각이 났어요. 탐스럽게 분홍색, 하얀색, 보라색 세 송이 중 유독 분홍색 수국이 그 친구를 닮아 있더라고요. 분홍색 수국의 꽃말은 '소녀의 꿈'이라고 하던데,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참 좋고 뭐든지 잘하던 경열이는 본인의 꿈을 마음껏 펼치며 잘 살고 있을 것 같아요. 누구와 함께 있어도 안에서 비타민 같은 역할로 주변을 훈훈하게 만들어줄 온화한 사람, 이런 친구가 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그 시절 제 일기장을 가득 채웠던 워너비 경열이의 인생을 언제나 축복하고 저의 에너지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네요.


잘 지내, 경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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