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러 Jun 30. 2021

그 밤, 그 해 여름

딸의 카운슬링

일요일의 한낮은 뜨거웠지만 캠핑의자와 돗자리를 챙겨 공원으로 나갔다. 만사가 귀찮았으나 전날, 내내 비로 옴짝달싹 못했기에 남편과 딸의 재촉에 따랐다. 가는 길에 얼음 동동 라떼를 픽업하고 메인으로 로제 떡볶이를 포장해 기분이 조금 레벨업 되긴 했다. 은율이는 이번에도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모구모구 음료수를 골랐다. 웬만하면 바뀌지 않는 꼿꼿함 어쩌면 똥고집의 그녀가 매운 걸 먹게 될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남편이 은율과 놀아주러 간 사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몇 자 보다 보면 눈알이 뻑뻑해 음악 감상으로 바꿨다. 이제 보니 은율의 몽환적인 그림과 참 잘 어울리는 잔나비의 그 밤 그 밤을 비롯해,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가장 많이 들었다. summer는 은율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이라 그 덕에 나도 듣게 된 음악이다. 그걸 들으며 생각했다. 이젠 정말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 하고. 때마침 남편과 교대하는 시점이 되어 땡볕에서 비눗방울 놀이를 했더니 더더욱 매가리가 없어졌다. 은율이랑 누워 숨을 고르다, 불현듯 상담을 시작했다. 은율이가 고민상담사, 고백은 내가 했다.


요즘 의욕이 안 생기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하루를 잘 보내고 싶은데 한 것도 없이 지치고 또 그렇게 밤을 맞이하면 허무해서 후회되고 그래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고민상담사가 말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나를 위해 취미 생활을 하세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보석 십자수나(응?) 바느질해서 인형 옷 만들기(네?) 같은 걸 하는 거예요. 이때! 중요한 거는 절대 핸드폰을 보지 말고 노트북으로 뭘 하지도 마세요. 그러면 머리가 복잡해지니까 쉴 수가 없어요. 난 왜 이럴까 그런 생각도 아예 하지 마세요.


하루 걸러 하루씩 비가 내리는 요상한 날씨는 우리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할 때도 벌어졌다. 마침 저녁은 뭘로 하지, 생각하던 찰나라 눈앞에 보이는 삼겹살 식당으로 순식간에 튀었다. 남편은 고기를 구웠고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입이 터질 만큼 상추쌈을 밀어 넣었는데, 그냥 그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건강의 핑계로 입에도 대지 않았던 맥주 한 잔이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경쾌함도 물론. 이 모든 순간의 평온함, 더 바랄 게 있을까. 건강해야만 하는 이유다.






월요일이었던 어제는 병원에 가서 검사 결과를 들었다. 다행히 심장 기능엔 이상이 없다 했다. 하지만 혈압이 오락가락 분포가 심하기 때문에 약 먹으며 관리해야 한댔다. 더불어 의도적으로 체중을 감량해 보랬다. 정상 체중이지만 감량을 하면 혈압도 낮아진다면서. 그러고 한 달 뒤, 다시 오랬다. 다음엔 피부과. 건조한 여름에 생기기 쉬운 가려움증이니 보습을 잘하면 된단다.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 진료는 몹시 가벼웠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길을 걸으며 큰 탈이 없음에 감사했다. 동시에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어쩌면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이 시점이 건강을 일 순위로 받아들이라는 강려크한 전조 같아서.


6월도 이제 끝이다. 지금 세운 계획이라면 썰물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을 추스르는 일. 너저분한 살림을 정돈하고 시답잖은 일과에 활력을 불어넣을 시점이랄까. 은율이 알려준 묘안대로 나와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잔가지를 쳐낸다 보면 되겠지. 이제 청소를 시작할까.


이전 19화 라이프, 생, 삶 그리고 건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