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회를 지나면서 나오는 22층 아파트 자리는 내가 5학년 때까지 살던 16평짜리 시영아파트가 있던 곳이다. 당시 시영아파트 발코니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기로 해가 매일 떨어졌다. 한강변에선 노량진과 여의도가 보였다. 아직 63빌딩 건축 전이었다.
시영아파트 뒤쪽 풀밭을 지나, 철조망을 기어올라 뛰어내리면 강변북로다.
국민학교 당시에는 강변북로에 지금처럼 차가 쉴 새 없이 다니진 않았다. 나는 좌우를 잘 살피고, 차가 뜸해지면 치타처럼 뛰어 강변북로를 건넜다. 반대편에 다다르면, 경사진 제방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여기엔 커다란 돌들이 45도 경사를 이루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가을. 박힌 돌 사이사이에는 코스모스가 자랐다. 벌들이 코스모스에 앉으면, 신발로 낚아챈 후 휘둘러 땅에 내려쳤다. 벌이 기절하면 침을 빼고 딸려 나오는 투명 내장을 빨아먹었다.
벌에선 벌 향기가 났다. 급하면 코스모스 꽃잎을 오므려 벌을 꽃 속에 가두기도 했다. 그러다 벌에 꼭~ 찔려 손가락이 후끈후끈 욱신 거렸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며
1976년 국민학교 4학년 가을 9월경.
한강변엔 물억새(꽃말:원망)가 허옇게 피었다. 벌을 잡기 위해 강변북로를 건너갔지만, 당시 갈대라고 생각했던 물억새가 아름다웠다. 어릴 적 갈대에는 기도문이 걸려 있었다. 어른들의 기도 속에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했기 때문이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태복음 12:20 개역개정)
하루하루 엄마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낮에도 자리에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눈은 십리나 들어가 있었다. 엄마 눈 밑은 어두운 색이었다. 엄마를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엄마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선물은 한강변에 피어 있는 물억새 아니 그 갈대였다.
하나님 지금 제가 갈대를 꺾어요.
엄마에게 선물할 것은
이 갈대 밖에는 없어요.
상한 갈대도 안 꺾는 하나님,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엄마 찾아 삼 만리
물억새를 한 묶음 잘라서, 다시 강변북로를 넘어 집에 왔다. 물억새 밑동을 가위로 잘라, 부엌에 있던 화병에 꽂았다. 피를 생각나게 하는 자주색 법랑 화병이었다. 항상 아프기만 한 엄마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고통이 심해진 엄마는 많은 시간 누워 있었지만, 아버지가 퇴근하면, 안 아픈 얼굴색으로 바꾸었다. 그제야 조금 살아나는 엄마가 항상 안타까웠다.
그해 6월부터 TBC에선 금요일 6시에 '엄마 찾아 3만 리'가 방영되었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 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 리"
-별 속에서도 엄마를 찾았다
이 방송은 주제가부터 슬펐다.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 환자로 만들 정도였다. '어엄~마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울부짖는 노랫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아아아~ 외로운 길' 목놓아 부른다.
이 만화영화를 볼 때마다, 엄마를 곧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찾아 3만 리'는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방영되었다. 껍데기뿐인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주인공 마르코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간 엄마를 찾아다녔다.
엄마는 아직 살아있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걱정할 것 없이 안 아픈 엄마를 찾아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