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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Feb 17. 2023

[신혼 첫날밤] 여신은 나를 구원했다

나는 다시 태어 난 거죠

  신혼여행이었다.

  2월을 며칠 앞둔 제주도의 바람은 나름 온화했다. 처음 보는 야자나무들이 택시 뒤로 휙 지났다. 둘은 특급호텔이 아닌 관광호텔에 들어갔고, 달빛 달린 어둠이 찾아왔다. 샤워를 했다.


  여신 숭배의식을 위해서.


  따끈한 물이 수많은 물구멍을 뚫고 쏟아졌다. 몸을 향해 꽂아 내렸다. 물에 맞은 피부는 벌겋게 움푹움푹했다. 열기를 담은 물방울들은 후끈한 김을 만들었다. 내 배를 두드렸다. 목과 얼굴 그리고 머리를 기관총처럼 쏴댔다. 방울들은 몸에 부딪히고 폭파돼 산화했다. 따라 나온 수증기는 마법처럼 퍼졌다. 바닥에서도 공중에서도 증기는 살아 나왔다.


  여신에게 미안했다. 솔직하지 못했다. 아내는 자기가 내 첫사랑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


  내 첫사랑은 5살 때, 혜선이 누나였다. 그때 여자의 몸을 알았다. 그녀의 똥도 아름다웠을 것 같았던 혜진이. 등대지기를 두 번씩이나 불러 주었던 음악의 여신 효숙이. 키 순서를 바꿔 내 짝으로 만들었던 경림이. 미련 없이 미국으로 날아가버린 지연이. 수많은 여신들이 내 삶을 지났는데, 결혼 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소리는 꿈결 같았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나. 정말 이게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할 텐데. 아직은 아니야.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은 설레이는 시간이야.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녀만을 생각해. 자꾸만 설레네. 설레이는 내 마음. 내 피부는 나긋나긋. 뼈는 노곳노곳.




  나는 지금 동화 속에 있는 걸까?  빛이 손짓하겠지. 마법의 세계로 달려오라고. 사랑을 나누라고. 수 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났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샤워 물줄기는 뜨겁다. 이 공간에 꽉 찬 수증기를 봐. 수증기는 앞을 분간할 수 없게 해. 볼 수 없어도 그대만 볼 수 있다면.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주일. 제주영락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까. 먼 훗날 헤어짐을 위한 시간일까. 우리에겐 시작도 끝도 필요하지 않아 그저 영원만이 존재할 거야.


 나는 눈을 감는다. 달빛은 다정히 감싸오고, 나를 보는 당신의 눈 빛을 본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결코.


  우연은 스쳐갔고, 느낄 수 있어. 밤하늘 혜성은 긴 꼬리로 날아가지. 혜성은 움직여. 살아있지. 혜성 같은 우리의 만남은 살아있었기에 가능했어.

만났어.

만~ 났.


  앞이 보이질 않았다. 흑암이 덮쳤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악~.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신부가 뛰어 들어왔다.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산소를 다잡아 먹은 수증기가 아내에게 돌진했다. 침 흘리는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끌어냈다. 나는 숨을 쉬었고 살아났다. 기적이었다.


기적의 Sailor Moon.
나는 믿고 있어요.
사랑의 Sailor Moon.


하늘나라 갈 뻔 한

신혼 첫 날밤

여신은 나를 구원했다.



ps 1. 세일러문 가사로 쓴 실제 신혼여행기였습니다.

    2. 이 글을 쓰고, 찾아본 결과,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긴장에 의한 '미주신경성실신(신경 심장성 실신)'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 미주신경성실신(신경 심장성 실신)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긴장=>혈관이 확장, 심장 박동이 느려져 => 급격히 낮아진 혈압 => 뇌로 가는 혈류량 감소 =>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 증상


“오랜 시간 서 있는 경우, 목욕탕이나 온천 등 뜨거운 물에 장시간 머물렀을 때, 혹은 햇볕에 장시간 노출됐을 때, 피를 보거나 신체의 일부가 다칠 위험에 처했을 때, 온도의 변화 등 주변의 환경이 급격히 변했을 때, 사람이 많은 밀폐된 공간에 갔을 때 미주신경성 실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https://www.naeunhospital.com/bbs/board.php?bo_table=hgid46&wr_id=162


※ 자표심이 노래합니다.

기적의 세일러문~


< 세일러문 >


(1절)

미안해, 솔직하지 못 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 할텐데
전화도 할 수 없는 밤이 오면
자꾸만 설레이는 내 마음
동화 속 마법의 세계로
손 짓하는 저 달 빛
밤 하늘 저 멀리서 빛 나고 있는
꿈 결 같은 우리의 사랑
수 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Sailor Moon

(2절)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까
헤어짐을 위한 시간일까
시작도 끝도 필요하지 않는
운명 같은 이 예감
다정히 감싸오는 저 달 빛은
나를 보는 당신의 눈 빛
수 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세일러문

(3절)
스치는 우연 속에 느낄 수 있는
혜성 같은 우리의 만남
수 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Sailor Moon
나는 믿고 있어요
사랑의 SAILOR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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