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우체통

20년 10월 22일의 기록

by 므므무

방에 묵혀뒀던 내 작품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다가
오래된 우체통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지금을 살면서
받았던 모든 편지들과
차마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안에는 축하와 사과와 고마움에
어색한 말투와 친근한 말투가 섞여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나를 스쳐갔구나 싶었다.

편지가 쑥스러울만큼 친해진 이도 있었고,
편지가 낯설만큼 연락이 끊긴 이도 있었고,
별것도 아닌일에 미안하다 하는 종이조각과,
생일을 축하한다는 알록달록한 포스트잇,
앞으로 평생 연락하자며 다짐하는 네모난 카드,
어디서 샀을지 그려지는 익숙한 디자인의 편지지들.
수많은 사람들이 쓴 글들이 모두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우체통에는 티켓들도 담겨있었는데,
누구랑 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영화티켓들과,
재밌어서 한참 웃었던 연극들.
지루하지만 일단 교양있는 척 봤던 사진전들과,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전시회들과,
고등학교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던 뮤지컬들.
어디서 샀는지 헷갈리는 엽서들과,
길치인 탓에 몇번이고 훑었을 팜플렛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겪었구나.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있게 된 것도 아마
이 수많은 편지와 티켓들 탓이겠지.
이 편지들을 받은 만큼 나도 독자가 한명뿐인 글들을 썼을테고,
이 티켓들을 사용한 만큼 여러 사람들의 예술을 보았겠지.

미래의 어느 시대에는 편지고 티켓이고 다 종이가 아니라 컴퓨터 안에 담겨있어
이런 추억의 우체통이 필요없어질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에는 클릭 한번으로 수치화된 경험들이 나열되어

'아, 이때 이랬구나.' 하고 한눈에 알아보겠지.
문득 그 미래에는 삶과 추억이 단순히 각진 표로만 남을 것 같아 조금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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