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7세. 나는 말띠다. 말은 나면 제주로 간다는데 서울로 왔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흔히 말하는 지잡대를 나왔다. 대학생활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학사 경고를 2번이나 맞고 퇴학 위기를 맞는다. 위기 뒤엔 기회라고 때마침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당시 IMF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폐업을 고민했다. 당시 300만 원이 훌쩍 넘는 등록금은 아버지에게 큰 짐이었다. 아들의 입대 소식은 아버지의 무게를 덜었다. 위태로운 집안 경제를 걱정하던 나는 군대를 길게 갔다. 육군 보다 4개월 긴 공군을 지원한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공군은 6주에 한 번 휴가를 나온다. 의도치 않게 자주 집을 찾았다. 부모님에게 휴가 나온 아들의 유흥비는 부담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처음 몇 번은 반가웠으나 이후 안 나오길 바라셨다고 한다.
군대 시간은 느리지만 밖에서 30개월은 빨랐다. 그동안 부모님 장사는 나아지긴커녕 더 악화됐다. 대출금에 시달리다 결국 살고 있는 집을 파셨다. 돈은 벌어야 했기에 가게는 보유하셨다. 지금도 후회하는 최악의 수였다. 대출금을 갚고 남은 돈으로 대구에 전세를 구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대구를 떠났다.
가게를 운영하려면 멀리 갈 수는 없었다. 대구 옆에 붙은 경산이 최적지였다. 불편을 무릅쓰고 장사를 이어갔지만 겨우 먹고 살 정도였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 하시겠다고 버티셨다. 졸업과 동시에 가게 문을 닫았다. 경기는 여전히 나빠 상가가 잘 팔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분양가 수준으로 헐값에 매도했다. 이와 달리 아파트 가격은 고공행진이었다. 예전에 1억에 판 아파트는 5억이 넘었다. 상가까지 헐값에 매도한 부모님 심정을 어찌 다 알겠냐만. 집안 공기는 한숨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때 생각했다. 부자가 되겠다고. 성공해서 부모님의 한숨을 잠재우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