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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진 Mar 18. 2024

야외에서 펼쳐지는 나만의 리그 경기




'예열'


오늘도 공원으로 출석한다. 날씨는 춥고 바람이 날 때리지만 굴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간다. 어김없이 경기장에서 불꽃 튀기며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벤치에 앉아 삶의 여유를 즐기는 어르신이 보인다. 그 모습이 너무 상반되어 융화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그들을 지나치며 나의 속도를 느껴본다. 달리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체력이 좋아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달리기에서 힘이 느껴진다. 오늘은 오랫동안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쟁자의 등장'


코스의 절반쯤 달렸을 때, 누가 뒤에서 힘차게 달려오더니 앞으로 쌩~ 하니 지나간다. 주황색 바람막이에 반바지가 눈에 띈다. 마치 자신의 건실함을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자신의 속도를 과시한다. 컨디션이 좋았던 나는 보란 듯이 땅을 박차고 나아간다. 화살은 쏘아졌다. 목표는 주황색 바람막이. 그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간 화살은 주황색 바람막이를 추월한다. 그와 동시에 목표를 잃은 화살은 추진력을 잃고 땅으로 떨어진다. 숨이 턱 하니 막히고 페이스를 잃었다. '헉헉..' 비웃기라도 하듯이 주황색 바람막이는 다시 나를 추월하고는 갈길을 간다. 졌다. 1패를 당한 나는 망연자실하게 속도를 줄여 호흡을 고른다. 이건 다시 나아가기 위한 재정비의 시간이라고 생각해 본다.





'리그 경기는 전투에 져도 전쟁에서만 이기면 돼'


리그 경기는 승점을 많이 쌓은 팀이 이긴다. 한 번은 져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공원에는 리그에 참가한 수많은 러너들이 있다. 오늘 그들은 모두 나의 경쟁자이자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희생양이 될 것이다. 주황색 바람막이는 단지 리그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을 뿐. 호흡을 고른 나는 다시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추월하며 달리다 보니 눈앞에 주황색 바람막이가 보인다. 이번엔 페이스를 유지하며 그보다 오래 달리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면서 다른 경쟁자에게 나를 추월할 기회는 주지 않는다. 초보러너에게 건방진 목표였지만 오늘은 집 나간 자존감을 되찾는 게 우선이다. '습습후후' 들숨과 날숨을 최대한으로 컨트롤한다. 몸을 리듬에 맡기고 에너지를 최소화한다. 모든 전략은 완벽하다. 이제 저 주황색 바람막이가 지치길 기다리면 나의 승리다. 전투에서는 네가 이겼지만 전쟁은 내가 이긴다.





'상처뿐인 영광'


아무리 생각해도 주황색 바람막이는 달리기 고수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멀어만 지고 내 무릎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뛰지만 한계다. 힘차게 돌아가던 엔진은 동력을 잃고 멈추고 만다. 완패다. 스피드에서도 지구력에서도 주황색 바람막이를 넘지 못했다. 망연자실하며 멈춰 선 나는 키로수를 확인했다. '9.8km.' 평소 5km를 뛰는 나에게는 엄청난 성과였다. 조금 놀랐지만 새로운 기록과 함께 부상이 찾아왔고 자존감은 돌아오지 못했다. 승리의 메달을 받고 싶었지만 기록 갱신만 해버렸고 반작용으로 일주일간 집에서 몸을 회복해야 했다. 지금도 이때 뛴 9.8km는 기네스 기록 마냥 깨지 못하고 있다. 주황색 바람막이 한 번만 더 나타나라.. 그땐 내가 10km까지는 뛰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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