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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마케터 Jul 09. 2020

우울의 치료제는 살아내는 것

우울의 터널을 지나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

# 2014년 5월, 손님들이 마시는 와인향이 퍼지고, 흥겨운 음악이 들려오는 살롱 9에서 쓰다

힘들다. 몸도, 마음도.

왜 힘들지?

글을 못 써서? 책을 못 읽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서?


힘이 안 난다. 몸은 무겁고,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마음도 계속 가라앉고 있다. 물 먹은 솜처럼 너무 무겁다.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쳐가고 있다.

카페 일을 하기가 싫어서일까? 지난주 주주 총회를 끝내고, 이제 살롱 9에서 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홀가분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커서인지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진다. 사실 내일 있을 면접도 걱정된다. 면접을 잘 봐서 일하는 동안 다음에 바로 일할 곳이 있다는 위안을 얻고 싶다. 하지만 합격하면 과연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다음에는 어디로 이력서를 보내봐야 하나. 과연 나를 받아줄 회사나 공간이 있기는 할까?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다음에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불안함.
잘해 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그저 어딘가에서 혼자 편히 쉬고 싶은 마음.
현재라는 시간에 오로지 있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울고 싶은 마음.

언제쯤 '지금 내 삶' 속에서 온전하게 환희를 느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들이 마구 뒤섞여 괴롭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재를 '버티며' 살고 싶지는 않다.


숨 쉬고 있으나, 쉬고 있지 않은 상태.
애써 숨을 쉬어야 겨우 살아지는.
배출을 하지 못해 더 괴로웠던 것일까? 

어제 <나는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의 저자 한명석 선생님의 글쓰기 강좌에서


글로 적어 종이 위에 펼쳐 놓는 만큼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긴다.


라고 하신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글을 배출의 통로로 사용하면서 내 마음과 몸의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감정들을 조금씩 자각하게 되었으며 감정들에 끌려다니지 않고 개의치 않는 상태로 점차 변해왔다. 물론 글 외에도 내게 도움이 되었던 많은 것들이 있지만 말이다.


배출. 안에서 밖으로 내보내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나?
얼마나 배출했고,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배출해야 할까?


다시 "척"하며 살고 있는 나를 보았다.

좋은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무엇이 좋지 않고, 왜 괜찮지 않은지, 어째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내게 또 한 번 찾아온 듯하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나.
이 생에 무엇을, 어디까지 해내야 하는 걸까?
남들처럼 사는 건 불가능할까?
나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오늘 아침 명상요가를 하며 나는 왜 눈물이 났을까? 

등에 베개를 두고, 그 베개를 느끼는데 도대체 왜 눈물이 났을까? 


예전에 찾아온 우울의 감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우울할 때는 끊임없이 내 생활과 내 주변 사람들을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나를 들여다볼 뿐이다. 각 순간마다 느끼는 나의 감정들과 내 마음을 자각하려 애쓰고 있다. 자각하고, 명료하게 느끼려 한다.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사람이나 상황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이 가장 먼저 내가 자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이 무엇에 끌려가고 있는가?
무엇이 자각하려는 마음을 방해하고 어지럽히고 있나?
그래서 나는 무엇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고, 아픈가?


사실 그저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면 그뿐인데. 끊임없이 "왜?"를 찾고 있다. 논리로, 이성으로 분석하려 하고 지금 상태를 스스로 이해시키고 설득시킬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나는 여기 있다. 그냥 여기 있다는 사실만이 사실이다. 무엇을 더 바라고 있나?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나는 그저 나일뿐인데.


내가 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주는 '외부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을 다시 읽으며 발견한 문장이다. 내가 우주임을 깨닫는 그 환희의 순간, 어쩌면 나는 사막에서 물을 찾듯이 내가 우주임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상요가를 하며 베개를 느끼며 오롯이 나로서 있었던 그 순간이 바로 그토록 내가 찾고 있던 순간이어서 무의식적으로 기쁜 마음에 눈물이 흐른 걸 지도 모른다. 


# 우울의 터널을 지나

2013년부터 시작한 우울의 기운이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분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 우울이란 녀석은 이렇게 사람이 세상과 이별하게 만드는구나.


우울은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점차 약해지게 만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 세상에 쓸모없는 구제불능, 밥이나 축내는 밥충이로 만들어 점차 삶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린다.


전쟁이 일어났다 머지않아 나의 불만과 우울증의 원인도 더는 찾을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그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치유될 수는 없지만 이 지옥 같은 시대를 살아나는 게 이기적인 우울함이나 환멸에 대한 훌륭한 치료가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


헤세의 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 같은 시대를 끝까지 살아내는 것'만이 우울함의 훌륭한 치료가 된다는 것을 시간을 지나 보니 알 것 같다. 우울이 나를 삼켜버리려고 할 때마다 이미 삶의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 많은 지인들처럼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다행히 누구라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라인이라는 가상현실 곳곳에 내 우울함을 드러냈고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조금씩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글쓰기는 고름이 터지듯 켜켜이 쌓여 곪아가던 감정을 배출시켰고, 명상은 고름이 터져 상처가 남은 자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이 치료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남아 우울의 흔적이 사라지자 우울에 결국 항복하고 이 세상에서 아스라이 사라져 간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이렇게 아프지 않게 되었더라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명상지도자가 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가족, 친구는 비록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울과 고군분투하며 지옥의 시대를 살아내고자 하는 누군가에게는 치료제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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