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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술맛이 사라진다

퇴사 후 비로소 알아가는 것들 [3]

by 수요일
지금 듣고 싶은 음악 : 장필순 노래 중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지금 생각나는 책 : 무라카미 하루키 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3] 그때 그 시절 술맛이 사라진다.


몰랐다. 아예 생각을 못한 변화다. 퇴사 후, 내가 '술'을 거의 마시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나를 아는 분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몰랐던 이 변화에 놀라고 있다.

그렇다고 퇴사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건 아니다. 회사를 다닐 때 갑자기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가 생겼다는 이유, 업체 미팅이 변경되어 어쩔 수 없다는 이유 등 개인적인 약속은 - 선약이어도 - 늘 미루어지거나 변경하기가 일 수였다.

시간이 많아지니 그동안 소홀하고 미안했던 내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 약속 자리에는 당연히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데 실제 마신 술은 따라놓은 맥주 한 잔을 넘지 못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에서도 거의 맥주캔을 따서 마신 기억이 없다.

8월의 마지막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9~10월을 지나면서도, 빈 속에 벌컥벌컥 홍수(?) 쏟아내듯이 마셨던 그 시원한 500CC 생맥 한 잔의 추억이 가물가물하다.


늘 좋아서 마셨던 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싫어서 억지로 마신 술도 없다.

'술 酒 '을 마시면서, 20년 사회생활 동안 쌓아두기만 하면 힘든 많은 말들을 내뱉으면 살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잊게 하여 복잡함을 정리했고, 몸이 힘들 때는 알아서 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조절도 해주었던 것 같다.

오늘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계약을 해서 너무 행복하다며 가장 친한 직장 동료에게 번개를 치고 칼퇴를 함께 한다.

안주는 중요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치킨과 생맥주가 놓인다. 빈속을 통해 시원한 맥주가 온몸에 퍼지는 이 '맛'이 최고라며 원샷을 한다. 그 맛은 말을 많이 했던 하루의 내 식도를 식혀주고, 부글부글 끓었던 심장의 열을 평온하게 낮춰준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 많은 수다들과 세 잔, 네 잔, 다섯 잔 연속의 건배!

그렇게 술자리를 하고 나면, 감소되는 스트레스, 일어난 문제점의 해결은 단 1%도 없다. 그래도 매번 그렇게 달리고 달렸다.


회사생활 기쁠 때, 힘들 때, 좌절할 때 언제나 함께 해주었던 그 '술맛'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퇴사 후, 저녁 약속에서 마시는 술잔에는 그때 그 시절 술맛을 느낄 수가 없다.

집에서도 맥주캔 하나를 딴다.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서방에게 준다. 한 번에 원샷하며, 벌컥벌컥 마셨던 그 통쾌한 맥주 맛이 없다.

와인은 와인맛이요, 맥주는 맥주 맛이다. 나에게 생각보다 그 맛은 많이 마실수 있는 맛이 더 이상 아니다.

이제는 오히려 술보다 함께 하는 음식, 안주가 훨씬 맛있다. 맛도 느끼고, 테이블에 올려진 안주 플레이팅도 보인다. 누가 먹기 전에 '잠깐!'을 외치며, 잘 구워진 삼겹살과 파가 뿌려져 있는 순살치킨 접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내가 술맛을? 술맛이 나를?

누가 누구를 먼저 멀리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술맛과 멀어짐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려 한다.

살다 보면, 그때 그 시절 '술맛'을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 때는 회사를 다니던 때 그리고 퇴사 후 지금보다, 조금 더 대범하고, 조금 더 여유있게 그 '술맛'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아 "라는 이유만으로, 다시 만난 '술맛'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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