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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그림자 속에 갇힌 그녀

그녀의 창백한 발자국은 눈 위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의 창백한 발자국은 눈 위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도망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은 절박함. 그 순간, 우리는 그녀가 아닌 척 외면할 수 있을까?


눈 내리는 겨울, 맨발의 도주

어제 저녁부터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백지 상태였습니다. 쌓인 눈은 6cm가 넘었고,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세상이 창 밖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직원들은 하나둘 눈길을 걱정하며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여인이 뛰어들어왔습니다. 홑치마 하나만 걸친 채, 맨발로. 하얀 눈밭을 뚫고 온 그녀의 발은 시뻘겋게 얼어 있었고, 발목에는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얼굴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고, 눈에는 이미 말라버린 눈물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여인: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주사님! 살려주세요!"

직워: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일단 여기 앉아요."

여인: "남편이... 남편이 죽이려고 해요."

직원: "아니, 왜요?"

여인: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모르겠어요... 또 술을 마시고... 제발 도와주세요..."

" 제가 주사님하고 바람을 핀대요"

그녀의 온몸은 떨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움찔했고, 그 순간 목덜미에 보이는 멍 자국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래된 멍과 새로운 멍이 겹쳐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멍이 아니라, 길고 긴 고통의 연대기였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 그녀의 집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이미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거리는 눈으로 빼곡히 쌓여 있어 걷기조차 버거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차에 오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보면 더 화낼 거예요..."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폭력의 굴레, 벗어날 수 없는 감옥


집안으로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술병 몇 개가 바닥에 굴러다녔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는 빙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방 한켠에는 산산조각 난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며칠 전, 겉옷이 없이 다니던 여인이 안쓰러워 선물했던 고가의 패딩은 남편의 가위질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천 조각들은 마치 피 흘리는 상처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그녀의 탈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직원: "선생님, 왜 이러신가요?"

남편: (흐릿한 눈으로 노려보며) "저 년이 바람을 폈어."

직원: "누구하고요?"

남편: "당신하고. 당신이 옷을 줬잖아. 비싼 옷을."

직원: "..."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손 댈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이성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의 손은 폭력의 기억으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거실 벽에 난 구멍들이 그의 분노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어보니 남편은 날마다 성관계를 강요했고, 거부할 경우 끔찍한 폭력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녀의 몸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허벅지와 가슴에 난 멍, 손목의 화상 자국, 등에 남은 띠 자국... 그것은 마치 고문의 흔적과도 같았습니다.

남편의 병명은 알코올 중독에 심각한 의처증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다른 사람과의 모든 접촉을 의심했습니다. 그녀가 입는 옷, 만나는 사람, 전화 통화까지 모두 감시했습니다.

그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종속,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막막함, 그리고 남편의 끊임없는 협박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네가 떠나면 내가 죽을 거야." "네 가족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런 말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가 술에서 깨어나면 보이는 눈물겨운 사랑의 맹세였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라는 약속은 매번 깨졌지만, 그녀는 그 희미한 빛에 의지했습니다.

그날 밤, 임시 조치로 그녀를 여성 쉼터로 피신시켰습니다. 다행히 제가 일하던 기관과 연계된 쉼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보다, 돌아갔을 때 맞을 그의 분노가 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돌아갔습니다. 남편의 눈물어린 사과와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에 다시 한 번 그 집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평화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단 며칠만에 다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메시지 뒤에 숨겨진 진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깨어진 날개로도 날고 싶었던 그녀


상담과 심리치료가 더욱 필요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곳에서는 아직도 두려움 속에서 폭행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청하지 못하거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거나, 혹은 잠시 도망쳐도 결국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그 여인은 결국 이혼을 요구하며 친정인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까지 찾아온 남편의 끊임없는 통곡과 애원에 결국 그녀는 다시 살기로 했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저는 체념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커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가정폭력의 악순환,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실패, 그리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현실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여성들,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된 이들,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취약계층은 더욱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생의 절벽에 있는 분들과 상담하고, 법에 의존하여 그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지만, 이젠 그 직에 마침표를 찍고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두 눈은 어두운 곳의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 - 침묵하지 않기


가정폭력은 더 이상 '집안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각한 범죄이며,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피해자들이 홀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첫째, 우리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비명 소리, 친구 얼굴의 멍 자국, 동료의 갑작스러운 결석... 이런 신호들을 우리는 종종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사생활 존중은 무의미합니다.


둘째, 시스템이 불완전합니다. 임시 보호명령, 접근금지명령 등의 법적 조치가 있지만, 실제로 피해자를 완전히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앞에서, 시스템은 종종 무력해집니다.


셋째, 피해자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이 부족합니다. 임시 거처, 경제적 지원, 심리 치료, 법률 자문, 자립 지원까지 이어지는 통합적인 서비스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주변에서 가정폭력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침묵하지 마세요. 전문기관에 신고하거나,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세요. 작은 관심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더 실효성 있는 보호 시스템을 구축하고, 피해자 지원 서비스를 확대해야 합니다. 기업과 시민사회는 가정폭력 예방 캠페인과 인식 개선 활동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육기관은 건강한 관계와 갈등 해결 방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가정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고,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맨발로 눈길을 뛰어와 도움을 청했던 그 여인처럼,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외침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모두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환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부디 그 가정에 평안이 찾아오길,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숨겨진 폭력이 빛 앞에 드러나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이 지금 폭력의 그림자 속에 있다면, 알아주세요.
당신의 고통은 실재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견딜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함이 아닌 용기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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