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딴짓 Sep 22. 2024

25. 여자 여행자들이 아이슬란드로 가는 이유

펍으로 간 한중일 세 여자

“한잔 하고 싶은데 같이 갈래?” 

6인실 숙소의 일본인 A가 물었다. “좋아.” 

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종일 돌아다니다 와서 막 쉬려던 참이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설상가상으로 이틀 내내 화난 사람처럼 무뚝뚝하게 굴던 중국 여자애까지 합류하겠다고 해서 더 가기 싫어졌다. 아니 쟤는 인사도 씹더니 왜 또 따라나서겠다는 거야? 



싱글벙글한 일본인, 속으로 후회막심인 한국인, 뚱한 표정의 중국인, 이렇게 세 여자가 숙소를 나섰다. 레이캬비크 시내의 술집. 금요일 밤, 술집은 라이브 음악과 이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큰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의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맥주를 주문한 상태.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고만고만한 영어 실력의 3인방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보아하니 셋 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한다. 이래저래 난감하군. 잠시 침묵. 



“중국의 우한에서 코로나가 시작됐잖아, 맞지?” 침묵을 깬 A의 첫마디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정작 민감한 이슈를 맥락 없이 던진 A는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맞아.” 중국인 B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만 했어. 사람들을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해서 엄청 힘들었지.” 뭐야, 중국인들은 자기네 나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막 화내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표정을 봐서는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나라도 그래. 사람들이 정부에 불만이 많은데, 정부는 국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일본에서는 계속된 불황으로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 한국은 어때?”  



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솔직하게? 혹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선에서? 까마득하게 어린애들 앞에서 내 나라 욕을 하는 게 괜찮은 걸까? 잠시 자기 검열의 시간이 있었지만 내 입은 이미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 직장인 엄마의 삶,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 정부에 대해서.



“나도 그 기사 봤어.” 두 어린 여자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야기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렇게 한·중·일 세 여자는 코로나, 홍콩 문제, 세 나라의 정부, 여성의 결혼과 출산, 권리에 대해 성토의 장을 열었다. 제한된 단어로 더듬더듬 문장을 만들고, 상대방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했지만, 분명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할머니가 싸우는 걸 지긋지긋하게 보고 자랐어. 지금은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는데, 우리 엄마는 졸업하자마자 중국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으라고 벌써부터 난리야. 본인도 평생 시어머니와 싸우고 힘든 결혼 생활을 했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는 이제 겨우 스물 한살이라고! 난 절대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결혼도, 사랑도 하지 않을 거야.” B의 꾹 다문 입술과 경직된 표정이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의 촌스러운 표정이라 싸잡아 생각했던 나는 문득 그녀가 측은해졌다. 전통적인 가족과 사회 앞에서 고집스럽게 서 있는 어린 여성. 한창 예쁜 사랑을 할 나이, 사랑조차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방어기제가 안타까웠다.  



“결혼하니까 어때?” 

B의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결혼 18년 차인 나에게 결혼에 관해 묻는다면, 음… 잠깐만. 생각 좀 해 볼게. 말없이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본 걸까. 우리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사랑했던 이야기 해줘.” 
“사랑? 정말 그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야?” 

“어!” B는 사실 동그란 눈매가 귀여운 딱 스물한 살의 아가씨였다. 

“어떤 것부터 들려줄까?” 

꺅, 두 아가씨는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흥겨운 대화를 방해한 것은 웬 덩치 큰 백인 남자였다. 
 “아가씨들, 다트 게임 한판 할래요?” 
갑자기 뭔 다트 게임? 이 펍에서는 흔한 건가? 아이슬란드 문화인가? 개수작인가? 알 수 없었다. 꺼져달라는 말의 친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천진난만한 A가 미소를 지으며 “해볼까?”라고 답했다. 남자는 셋이 한꺼번에 가면 우리가 앉았던 자리가 빼앗길 수 있으니 한 명은 자리에 남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렇게 내가 남기로 했다. 두 여자가 사라지고 나는 멘붕에 빠졌다.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걔들을 보내다니! 뭔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안전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하는데! 동양 여자 셋이 펍에 온 것부터가 실수였나? 둘만 데려간 것도 계획적인 거 아니었나? 머릿속에 전쟁이 나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백인 남자 한 명이 내 앞에 쓱 앉았다. 그는 뜬금없이 내게 아이슬란드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 해 보라고 했다. 아까 그놈과 한패일까? 잠시 후 남자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얘네들을 데리고 와야겠다, 싶어서 일어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두 미녀가 내 앞에 철퍼덕 앉았다. 
 


“아이슬란드에 온 걸 환영해! 그런데 아까 그 뚱뚱한 남자랑 아는 사이야?” 

“아니.” 

“있지, 그 남자 조심해.” 게슴츠레 뜬 눈에도 발음이 명확했다. 머리가 쭈뼛 서려는 찰나, A와 B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났다. 나는 집 나간 사춘기 딸내미가 나타난 듯 둘을 반겼다. 그들은 다트 게임을 잘하지 못해서 별 재미가 없었다며 멋쩍어했다. “나가자.” 도망치듯 펍을 나왔다. 펍 앞에는 길게 대기 줄이 이어져 있었다. 콩알만 해졌던 내 간은 그제야 제 크기를 찾았다. 




밤 12시. 백야라 해가 지지 않는 거리에는 어슴푸레 노을 같은 것이 드리워졌고, 숙소로 가는 거리는 안전해 보였다.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왜 아이슬란드에 왔는지가 다트 게임 전 마지막 대화였다. 



“강간당하지 않을 나라를 찾았어.” 

A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니까. 그 수치를 믿었어.” B가 덧붙였다. 그 순간, 이번 여행 중 스쳐 지나간 수많은 배낭 여행객들이 떠올랐다. 여자 혼자, 혹은 둘이 배낭을 메고 버스를 기다리던 모습. 여행의 제1 조건으로 당연하게 얘기하는 ‘안전’이라는 단어가 여자들에게는 ‘생존’과도 같은 개념이지 않을까.  



“그런데 한국에는 강간이 많다며?” 

나는 또다시 훅 들어온 B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벌게지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B가 어디에서 저런 말을 들었는지 묻지 못했다. 너네 나라는 그렇지 않냐고 질문에 질문으로 되갚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 내 나라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나 묻지 마 폭력이 많다는 걸 알아. 사회가 어려워질수록 누군가는 약자를 찾아서 쉽게 분풀이를 하지. 그 대상이 여자고, 여자는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정당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해. 왜냐하면 들어주지 않거든. 그렇게 매일 여성에 대한 폭행이 일어난대…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 수치를 제대로 알아본 적이 있었나. 그 여자들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존재인데 과연 나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정확하게 ‘알고’ 있나. “맞아, 부끄럽지.” 결국 짤막하게 대답하며 생각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행동은커녕 알지도 못하는구나. 부끄러웠다. 



다음 날,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나는 레이캬비크를 떠나 공항 근처로, B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떠났다. A만 도심에 남았다. 그날, 그들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과 일본에 대한 편견을 떠나 비슷한 정서와 어려움을 가진 동양 여자 셋의 돈독한 시간. 그러나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그들에게 해 주지 못한 말이 떠올라 마음이 아득해진다. 내 아들보다 겨우 네 살 많은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사회를 떠나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혼자 멀리 떠나와 낯선 나라에서의 여정을 이어가면서, 여전히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아직 너무 앳된 그들. 



나는 당신들 나이에 그렇게 나아가지 못했다고, 당신들 대단히 멋지다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사랑 앞에서 움츠리지 말라고, 다만 늘 자신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라고, 같은 여자로서 진심으로 당신들을 응원한다고, 이 아줌마도 씩씩하게 살겠노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의 엄마 나이 또래 여자로부터 듣는 말이 작은 위안이나 용기라도 되었더라면. 그저 나만의 부채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쉬움에 나는 가끔 그 둘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게시물에 조용히 하트를 꾹 눌러본다. 그녀들의 여정을 응원하며.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전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할 수 있습니다!   
이전 24화 24. 젊은 여행자들이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