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3일 전, 아들은 친구 녀석 넷과 함께 강남으로 몰려갔다. 엄카를 들고 모인 다섯 명의 고딩은 패션의 성지 강남구 신사동과 청담동을 활보했다. 밤늦게 귀가한 아들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엄마, 이거 엄마가 환불해 주면 안 돼?"
"야 너는 진짜! 유니클로는 우리 동네에도 있는데 신사동까지 왜!"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비춰보던 아들은 거실 중간에 옷을 벗어던져놓고는 방으로 호로록 들어가 버렸다. 백화점까지 죄다 돌았다지만 '상식선에서'라는 신용카드 사용 조건에 갈 수 있는 곳이 뻔했으리라.
"뭐 입고 가지? 아 진짜 고민된다~~~!"
전날 밤, 아들은 있는 옷, 없는 옷을 죄다 꺼내 가방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길이가 70센티에 달하는 운동선수용 대형 보스턴백에 짐을 챙겼다. 옷가방이었다.
- 바지 4벌(청바지 2, 면바지, 트레이닝 배기팬츠)
- 상의 4벌(재킷, 난방, 티셔츠 2)
- 기타 (토너, 로션, 선크림, 향수, 렌즈, 1회용 밴드, 폼클렌징 등 세면도구, 등등등)
"아니, 칫솔만 챙기면 되는 거 아냐?"
"에이그, 요즘 애들이 그래? 애들한테는 정말 중요한 날이잖아."
남편의 말에 나는 아들을 두둔했지만, 아닌 게 아니라 걱정이었다. 작고 왜소한 아들에게 가방은 유독 커 보였다. '하나도 안 무거워'라는 시크한 표정을 연출하며 한쪽 어깨에 가방끈을 척 얹겠지.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은 누가 봐도 빤히 보이겠지만. 딸내미가 수학여행 가는 길에 고데기를 빠트려 하마터면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세울 뻔했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부산행. 2박 3일.
오전 9시에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2시간 10분이면 뚝딱 도착하는 참 편한 세상.
정신없이 아들을 보내고 그제야 찬찬히 일정표를 들어다 본 나는 탄식했다.
- 4인 1실, 개별 침대의 4성급 호텔
- 부산 롯데월드, 루지 체험, 요트 체험
- 한우 불고기 전골, 명륜진사갈비, 낙곱새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여행이었다.
심지어 부러웠다.
이번 수학여행비의 인당 경비는 59만 원이었다. 이중 교육청이 지원하는 50만 원을 제외하면 실제 내가 낸 돈은 9만 원이었다.
"애들 수는 줄었는데, 교육부 예산은 넉넉하니까. 전국 다 그럴걸?"
친구와 통화하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던 나는 문득 얼마 전 서울 사는 지인이 아들의 수학여행비로 50여만 원을 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제야 검색해 보았다.
지자체별로 지원 차이가 큰데, 그 또한 세수 예측에 따라 교육교부금이 '롤러코스터'를 탄다는 열흘 전 기사가 보였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어려운 곳이 많은 요즘,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세금이 쓰이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경기도가 지차제 중 처음으로 올해부터 모든 고등학생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수학여행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살펴보려고 학교 공지사항을 체크하던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번 수학여행에 불참하는 아이들이 17명이나 되는 것이다.
자가 부담금이 9만 원이라 큰 부담은 안 될 것 같은데, 전체 2학년에서 10퍼센트 가까운 아이들이 불참이라니?
'공부 때문이구나.'
2주 후에 전국 연합 고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3일간의 결석은 학습 패턴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의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대견하고 안타까웠다. 혹시 수학여행을 가긴 하는데 공부 생각에 불안한 마음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겠다 싶었다. 2박 3일간 아들의 근태 상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으로 여겼던 나에게 '17명'이라는 숫자는 남다르게 느껴졌다.
"OO이가 수학여행도 가는 거 보니까 친구들이랑 잘 지내나 보네! 야, 잘 됐다!"
혹시 수학여행 가서 사고는 치지 않을는지 걱정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친구들이랑 잘 지낸다... 그런가?
그렇다면 혹시 그 17명 중에 친구와의 관계가 불편해서 수학여행을 안 가는, 아니 못 가는 아이가 있으려나? 그 생각을 하자 아까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아파왔다. 그런 아이가 제발 없기를 바라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번 수학여행.
사실 '수학여행'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세월호 참사이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올해로 벌써 11년째. 여객 정원을 늘리기 위한 선체 증축, 허용량보다 2배 많은 화물양 탑재, 조타기 고장 등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진 건 지금으로부터 겨우 한 달 전인 지난달이다.
'수학여행'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누군가에게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사실.
버라이어티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아들이 또 하나를 무사히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만히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나는, 문득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