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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Jan 13. 2024

사랑, 주기와 받기라는 그 흔한 질문

글쓰기 주제 앞에 긁적긁적



오늘의 글쓰기 주제: 사랑받기와 주기,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여러분의 생각은요?)



“무조건 너를 최고로 사랑해 주는 사람여야 돼. 우리 나이에 뭐가 아쉽다고…”

“대화 통하고 취향 같고 너 귀하게 여겨 주고…”

“연애만 해. 절대 결혼은 안된다 너!”

“...... 네가 아까워!”




이른 나이에 결혼한 친구는 아이들이 20대가 되었다. 몇 년 전 이혼한 친구는 최근 연애를 시작했고, 친구인 우리들은 그 남자가 그녀에게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노 단위로 격하게 분석 중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며 그렇게 우리는 밤샘 토론이라도 할 수 있다.




친구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선 넘은 조언에는 자신들의 한이 깃들어 있다. 내 배우자의 무심함, 배우자와의 갈등, 속 썩이는 자식,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피곤함이 친구에게 던지는 말에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가만, 그런데 이 보송보송한 사랑을 응원부터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까마득한 옛날, 그러니까 나의 연애 시절, 남편은 사랑에 목 맨 자가 아니었다. 애프터 신청을 당연시 여겼던 그 시절, 소개팅 후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예상치 못했기에 황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쳇, 나도 별로였다고!’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을 박박 지워 냈다. 한 달 만에 연락을 해온 그는 그동안 너무 바빴다고 했다. 담백한 해명. 끝. 미안해 죽겠다는 시늉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사람도 있었다. 고운 글씨로 매일 써나간 일기장을 수줍게 내민 자도 있었다. 신앙심이 좋았던 어떤 남자도, 무난하게 교수가 될 미래가 보장된 그도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내게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자신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는 당돌한 자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누가 봐도 고양이 과인, ‘나는 개인주의자요’라고 써 붙인 남자와 결혼했다. 고양이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 그때는 이 지경인지 몰랐다. 연애 시절에 상대방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결혼 커플이 없을지도 모른다. 서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은 원 부모에게 돌봄과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나는 돌봄을 과하게 받은 데다 거기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겪으며 나는 갑자기 일하면서도 살림을 하고 가족을 챙기고 사랑도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성이 되어야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결혼한 여성에게 기대되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한 몸 돌보기도 허우적댔다. 




아이들의 상황을 용이 주도하게 살피다가 적재적소에 튀어나가 도움을 주는 것. 때마다 집을 단장하고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 이러한 실제적인 돌봄에 나는 재주가 없다. 잘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관심도 능력도 없다. 딱 기본만 할 수 있다. 거기까지가 최선이다.




“일하면서 어떻게 가정도 잘 돌보시는지요?” 훌륭한 여성 지도자들은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잘 못하는데요. 둘을 다 잘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여성 지도자의 담담한 대답은 통쾌했고 감동이었다. 그녀는 질문한 기자에게 되물었다. “남자분께도 이런 질문을 하시나요?”






오늘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다 보니 떠오른 연애시절 추억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사랑을 잘 주는 사람인가, 생각하다가 엄마로서 내가 돌봄을 잘하는가,라는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고 그것에 해명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영 별로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확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말에 '조건 없는' '숭고한' 심지어 '희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뻥 차 버릴까? 




사랑의 대상을 남편과 자식에 대한 것으로 국한시키는 제한된 상상력도 씁쓸하다. 우리 가족 외 다른 이에게도, 더 나아가 사람 외의 것으로는 왜 확장시키지 못하나. 





사랑을 준다(give)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누군가는 실제적으로 돌보는 것(care)을 잘할 수도 있다. 어떤 엄마는 끼니마다 놀라운 음식 음식 솜씨로 가족들에게 사랑을 전할 것이다. 나 또한 남편이 매콤한 김치 콩나물국을, 큰 아들이 된장찌개와 생선조림을, 작은 아들이 짬뽕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것을 보면 흐뭇한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만들어줘야지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는 하늘, 사람, 봄, 온기, 꿈, 세상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눈을 마주 보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유튜브에서 들려주는 말 말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전하는 것에 (더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이 향해 있다. 이 사랑이라면, 나는 주는 것이 기쁘다. 




살면서 내게는 도움의 손길이 많았다. 친정이나 시댁이 그랬고, 오랫동안 친언니 같은 동네 엄마들의 도움도 받았다. 회사 상사는 나의 20년째 멘토이다. 반면 나는 사람을 챙기는 것을 잘 못하는 자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일방적이지도 않으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나의 방식으로 사랑을 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는 다정함.’ 어느 날 친구가 보내온 김연수 작가의 이 말을 그 순간부터 나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많이 받았고 이제 나는 사랑을 주는 자이고 싶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용기 있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자매애’라는 말은 나와 혈육관계는 없지만 다양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여성 연대를 의미한다. 최근 이 말은 여성이라는 범위에서 나아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상호 관심과 돌봄, 사랑의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giver이자 taker가 되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 쓰이는 관계가 되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 





덧붙임. 


아. 남편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나는 받는 자이고 싶다. 그러나 이번 생은 글른 듯하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안다. 밥을 먹고 나서도 꼭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옹졸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giver가 되자,라고 생각해 본다. 혹시 나중에 그도 giver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님 말고. (불현듯 남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혹시 그는 자신을 giver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에이 설마... 헉 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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