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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학교로.

_2024년 4월.

by 롤빵
4月, 아이는 힘들지만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아이의 급진적인 호전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 가는 걸 두려워한 아이를 위해 나와 남편은 여러 노력을 해야만 했다. 돌봄 교실에 뽑혔음에도 새로운 단체를 불안해하는 아이를 위해 과감히 포기하게 되었다. 물론 다니던 피아노 학원도 마찬가지. 아이의 2학년 등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교문 앞에서 울며 떼쓸 때마다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보폭을 맞추며 교문 앞에서 교실까지 재밌는 놀이 하듯 한발 한발 앞뒤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마치 5살 아이 달래듯 하는 모습은 주변 친구들과 학부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식하면 또 다시 아이를 개 끌듯 끌고 갈 것 같았다. 늦더라도 등교를 시킨다는 목적에 집중했다. 다행히 아이는 스스로도 다짐을 했는지 꼭 학교에 가고야 말겠다 의지로 교실에 들어갔다.


3월 한 달 동안 아이의 상처를 느꼈던 나는 담임선생님과 긴밀히 연락하며 아이가 너무 불안해해서 조퇴를 하고 싶다면 그대로 수용하기로 했다. 남자지만 섬세했던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표정이나 눈빛이 불안해 보이면 연락을 주시고 의견을 묻곤 하셨다.


아이는 쉬는 시간이면 전화를 했다. 핸드폰이나 학교 전화로 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집에 있는지, 집에 있다면 뭘 하고 있는지, 집 말고 다른 볼일이 있다면 바로 오고 싶어 했기에 말 한마디 속시원히 하기 어려웠다. 매 수업이 40분 간격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내가 운동을 하러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운전을 해야한다면 수업시간에 맞춰 동선을 짜고 쉬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집 분위기가 전달되게끔 조심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위험요소도 최대한 감수하기 위해 친구를 만나거나 차를 타는 볼일은 거의 포기해야만 했다.


전화를 늦게 받아서도 안 됐다. 조금이라도 늦게 받으면 또다시 불안이 발동했다. 말투가 건조하거나 저음이어도 불안해했다. 최대한 밝게 아이 말에 기분 좋게 리액션하려 애썼다. 나의 미세한 불안이 아이를 점령할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1년 내내 지속된 이 전화는 피로감이 상당했는데, 아이가 서서히 나아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쨌건 우리는 심리상담을 피할 수 없었다.

TV에 나왔던 공인된 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학교 위클래스 심리상담도 꽤나 잘 되어 있었지만 사설 심리상담을 이미 시작한 상태라 주 상담센터를 기준으로 아이를 케어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우리가 선택한 상담은 모래놀이였는데 40분 아이상담 + 10분 부모상담으로 토요일마다 가게 되었다.

모래와 각종 피규어로 여러 가지 상황연출을 한 다음 일주일간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나 집에서의 생활이 힘든지, 힘들다면 어떤 게 힘든지, 친구관계는 어떤지 아이의 심리를 유도하는 질문으로 캐치해 나가는 방식이셨던 것 같다. 나와 남편은 모래놀이를 통해 아이의 마음을 들으며 실로 참담했다.


아이는 가운데 큰 호수를 기준으로 주변엔 사람들을 3 커플정도 (모래판에 비해) 한산하게 표현했는데, 모두 한결같이 먹을 것을 먹거나 식당건물과 사람들이거나, 식탁 위에 먹을 것을 차려놓는 등 먹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가운데 호수엔 큰 배를 정박해 놓았고, 주위에 학교나 시설 같은 곳은 없었다.

아이가 먹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느끼게 된 것도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라 했다. 유난히 달달한 간식을 좋아했던 아이를 소아당뇨가 유발될까 걱정하며 항상 다그치기만 했지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어린이집 끝나고 먹는 킨더조이나 꽤나 묵직한 외국 간식들.. 밥을 먹자마자 단것을 찾는 행동이 아이에게 안식처가 되었던 걸까? 아이는 불안할 때면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학교엔 간식을 가져갈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손톱이나 손톱 주변의 살을 뜯는 것으로 표현된 아이의 마음. 멀쩡한 손가락이 없을 정도로 아이의 손톱 주변은 너덜너덜했다. (모든 아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또한 모래판 한가운데 호수는 일종의 엄마의 자궁 같은 곳인데, 아이는 그곳에 배를 정박시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상담을 받았다. 한마디로 아이는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고, 엄마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인 것이다. 나는 첫 상담부터 마음이 저리다 못해 아파왔다. 그에 반해 남편의 태도는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성적표라도 받아 든 냥 상담 선생님 질문에 까칠하게 반응했다.


상담을 하면서 느끼게 된 건 분명 아이의 문제로 이곳에 왔지만, 가정문제에 대한 상담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부모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커야 한다. 그만큼 부모의 심리상태나 아이를 대하는 태도 모두가 중요했는데, 남편은 아이에게 편안한 마음보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교육시켰고, 반대로 나는 수용적이고 자율성이 높지만 불규칙한 생활로 일에 몰두했다. 나는 남편의 수용적이지 못한 태도에 불만이 많았고, 남편은 내 태도에 대한 불만을 잔소리로 표현했다. 아이는 아빠는 어려웠고, 엄마에겐 관심이 고팠다. 그 분위기가 부모 상담시간에 캐치됐는지 선생님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우리부부의 태도도 교정해 주셨다.

아이에 대한 '말투교정'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라’ 정도의 높이로 (잘했든 못했든)학교 다녀온 사실 자체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라는 것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막상 실행해 보면 어려웠다. 어른 습관 교정 같은 거라 일상 속에서 꽤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큰 반면에 급한 성격 탓에 화내는 말투를 보일 때가 많았고, 남편은 이명으로 인해 작고 우물거리는 말투를 구사하지만 가끔 화날 때만 큰 목소리를 냈다. 내가 애교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남편 역시 애정표현이 서툰 편이었으므로, 우리는 화가 날 때 빼고는 아이가 바라는 밝은 톤의 목소리를 낼 일이 잘 없었던 것 같다. 남편과 나는 일의 피로를 OTT나 스마트폰으로 풀며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다. 피곤할수록 화나 보이는 표정과 말이 없어지는 부부였기에 아이에게 살갑게 표현하는 것이 어찌나 어색하고 힘든지... 결국 참다못한 딸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마지막 음절 하나만이라도 올려봐. 여름아 학교 잘 다녀 왔(라음)니?”


나는 10분간의 부모상담으로 다음 일주일은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코치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부부간에 필요했던 대화에도 한결 도움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사진출처 _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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