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스무 살과 삶의 평행우주
- 1997년 6월 7번 국도 -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앞이 안 보여
옆만 보이던
내가 안 보여
너만 보이던
7번 국도
백사장 보다 하얀 네 목엔 동해바다가
푸른 핏줄로 번지고
검푸른 바다보다 깊은 네 눈 위엔
잿빛 아스팔트가 바람에 번지고
네 옆의 옆, 그 바다를 따라
지구 이전에도 이 길은
옆 만 보고 달렸을 거야
모래 알갱이를 소리 내어 세면
노래로 사라지지
모래 한 알의 숫자가 우주 한 알의 음표로 바뀌고
부질없이 다른 우주로 여행을 떠나면
순간의 순간들이 부서지고
그 순간의 우주는
관성의 힘으로 표류하지
슬프니까. 슬퍼서 슬픈 것.
그땐 하루가
그 길만큼 길어서
그땐 인생도
그 모래보다 많아서
셀 수 없어서
노래할 수 없으니
스무 살은 사라지지 않았다.
파도의 끝이 이어지면
나무젓가락에 걸린 인스턴트 은하수
한입 후루룩 삼켜 그리운 허기를 달랜다.
어느 모래 알갱이 속에
네가
갇혀있는지 몰라서
이 우주를 일직선으로 방랑한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옆이 안 보여
앞만 보이는
나만 보이는
지금
이 길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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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론을 믿는다면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은 없다고 하죠. 다만 내가 유일한 나라는 고집만 버릴 수 있다면 두 갈래 아니 백 갈래 길도 모두 갔을뿐더러, 성공과 실패 그도 아닌 퀀텀의 중첩의 이야기도 계속될 겁니다.
가끔 여름이 시작되는 바다를 보면, 스무 살로 스물한 살로 돌아갑니다.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들을 얼마나 셀 수 있을까 시간이 모래만큼 많다고 느껴졌던 그 모래만큼 걱정과 배고픔도 많았던 스무 살로 조용히 여행을 떠나면 사랑은 물리학의 법칙처럼 불공평하고, 엇갈림은 시간의 흐름만큼 당연한 일들이 됩니다.
현재가 답답하고, 무겁고 힘들 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컵라면 하나를 챙겨서 바닷가에 앉아 시간을 보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을 생각합니다. 그땐 옆을 자주 보고 살았습니다. 버스를 타면 창 밖으로 옆을 보고,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함께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느라 옆을 봤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기억의 풍경이 그려졌나 봅니다. 옆을 보는 가난한 청년, 주머니 속의 지폐와 동전을 세어가며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그 조차 없어지거나 잃어버리면 그냥 그 바닷가 어디에 살아버려야지... 했던 그 마음이 아련합니다. 평행우주 속의 이 글을 쓰는 나는 경주마처럼 앞만 바라봅니다. 나란히 가며 옆모습을 보기보다는 마주 보고 멈춰 서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책임지고 그렇게... 지금의 이 굴레에서 두꺼운 톱니바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자유라는 건 스무 살 보다도 정의하고 그려내기 어려운 것이네요. 옆을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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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갈 수 없는 시간과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나 봅니다.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한 '인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영생하며 우리에게 두 개의 우주를 살았노라 말해주는 실존하는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되어 우리에게 일종의 신비로움과 믿음의 영역에서 빛나겠죠.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몇 개의 우주가 더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린 어느 우주에서 모래알갱이보다 많은 우주 속의 모래알갱이로 살아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