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감치 그림일기 7
수채화 전용 도화지가 떨어져 갈 때쯤 살짝 고민을 하다가 아크릴 물감을 샀다. 아크릴 물감은 색감이 유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물을 용매로 쓰기에 간편하기도 하고 물감을 바른 후에도 금방 말라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딱이었다. 또 하나 이유는 딸놈께서 그렸거나 그리다 만 적잖은 수의 캔버스가, 집에서 마치 그분처럼 뒹굴고 있던 것이다. 그림이 있는 캔버스 위에 흰 제쏘를 바르고 다시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었다.
그보다 먼저 딸놈께 전화해 혹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있느냐 물었더니,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제발 빨리!’ 없애달라는 답이 돌아온다. 쿨한 건지, 증거를 없애야 할 쿨하지 못한 과거가 있는 것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잽싸게 제쏘를 발라 불가역의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아크릴로 그린 첫 그림은 비 오는 날 풍경이다. 1년 여 전,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느낀 제일 큰 장점은 수시로 후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유였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만난 풍경은, 차유리에 묻은 빗방울이 흐르면서 형태는 왜곡되고 색은 제멋대로 번진 것이다.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장면이기도 하지만, 실력이 달리는 아마추어에게는 온전한 형태를 제대로 그리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장면이기도 했다.
의욕에 차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캔버스 위에는 절망이나 발라지고 그 위에 다시 절망만 덧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쓰지 말라는 형광물감까지 잔뜩 바른 것을 보고도) 선생님은 쌤통이라는 듯(물론 내 생각이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강좌실을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오고 가면서 계속 웃었다. 그때 알았다. 선생님이 열라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곡절 끝에 그림을 어떻게 완성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냥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년 동네 전시에 이 그림을 걸기로 했다. 선생님은 그림에 액자를 입혀오라 했다. 아크릴 물감 값도 무거운 데다 액자 값도 만만찮았다. 인근 도시의 화랑가를 찾았다. 한 표구사를 지나는데 바닥에 정확하게 10호F로 보이는 액자가 눈에 띄었다. 물론 표구는 한국화 화선지에 입히는 장식이다. 그런데 그 바닥에 서양화 액자가 뒹굴고 있었다. 최대한 니글거리는 웃음을 띄우고는 사장님에게 말을 붙였다.
“아니 표구사에 캔버스 액자가 다 있네요?”
“왜요?” 나이 든 사장님은 좀 싸늘했다.
“제가 딱 저게 필요해서요. 떼어놓은 거면 제가…, 싸게…, 어떻게?” 주섬주섬(지금 생각하면 이 아저씨 참 불쌍타.)
“저걸 뭐, 가져가슈, 그냥.” 사장님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비굴하게 얻어온 액자에 신나게 캔버스를 끼우는 순간(너무 신났나?) 그만 액자 모퉁이가 빠각, 깨지고 만다. 종이찰흙을 사다가 떨어진 부분을 열심히 메꾸고 물감을 발라 색을 맞춰봤다. 말라가던 찰흙은 곧 부스스 떨어진다. 참, 세상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다 있다는 다이소에서 비슷한 색깔의 시트지를 사다가 오려 붙여 마치 온전한 액자인 냥 전시회에 걸었다. 팍팍 티가 난다.
그런데 전시가 끝나고, 같이 그림을 배우는 여성 도반 한 분이 몇 번이나 이 그림에 대해 묻는다. 깨진 액자를 벗은 그림은, 당연하게도 집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분이 그림을 달라고 했다. 물론 보상은 한다고. 현금은 아니나 꽤 값나가는 양주와 와인으로. 그래서 내 첫 아크릴 그림은 (고맙게도) 이렇게 판매되었다.
내게는 이틀의 기억만 남았다. 하루는 신나게 양주를 퍼마신 날이고, 다른 하루는 마르지 않은 걸레처럼 늘어져 꼼짝 못했던 날이다.